위성 제작에 15년 달라는 첸 박사에게 마오쩌둥 “모든 걸 맡기겠다”

[한국대학신문 이우희 기자] 마오쩌둥은 첸쉐썬 박사 귀국 작전에 성공한 뒤 독대를 했다. 마오는 대뜸 그에게 “인공위성이 필요한데, 가능한가?”고 물었다. 첸 박사의 대답은 “15년의 시간을 달라”였다. 기초과학 5년, 응용과학 5년, 모두 10년을 가르친 뒤, 5년간의 실제 제작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어 “정부는 돈과 사람만 대주면 된다”고 했다. 마오의 대답은 신뢰였다. “모든 걸 첸 동지에게 맡기세요. 믿어야 합니다.”

중국 항공우주개발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첸쉐썬 박사의 일생을 보면 중국의 저돌적인 과학기술 전략을 읽을 수 있다. 첸 박사는 노벨상 수상자는 아니지만, 유인 우주선은 물론 우주정거장까지 발사하며 미국을 바짝 추격하는 중국의 항공우주기술을 맨 앞에서 이끈 인물이다.

첸 박사는 중국의 전국대학입학고사 기계공학 분야에서 3등을 하고 상하이 자오퉁대학(交通大學)에서 철도공학을 공부한 수재였다. 국비유학생으로 미국 MIT(매사추세츠 공과대학)와 칼텍(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공부하면서 36살에 젊은 나이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에어로다이나믹스와 제트 추진 분야의 권위자가 됐다. 독일 나치 정권하에서 V-2로켓을 개발한 본 부라운 박사가 패전후 미국에 압송되어 올 때 그를 처음 심문(Debriefing)한 사람이 첸 박사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흥미로운 것은 첸 박사를 영입하려는 중국의 국가적인 정성과 전략이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첸 박사는 "학문으로 조국에 봉사하겠다”며 이듬해 800㎏에 달하는 서적과 노트를 갖고 중국 귀환을 시도하다 미 연방수사국에 의해 감금됐다. 스파이 혐의였다. 동료 교수들이나 모교 총장의 탄원서도 미국의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중국이 움직였다. 마오쩌둥은 1950년부터 첸 박사 귀국 공작에 착수한다. 5년 동안 구금과 감시 속에 놓여있던 첸 박사는 1955년 담뱃갑 종이에 글을 써 스위스의 친척에게 보냈고, 귀국(歸國)을 도와달라는 간절한 호소가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에게 전달되기에 이른다.

중국 정부는 즉시 미국과 협상을 벌여 6.25 전쟁 당시 생포한 미 조종사 11명과 첸 박사를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미국은 강경했다. 당시 미 해군 참모차장은 "그는 5개 사단의 위력과 맞먹는다. 총살할지언정 귀국은 절대 허용할 수 없다"고 일갈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마오의 명을 받은 저우언라이가 직접 나선 협상은 끈질겼고 5년간의 담판 끝에 첸 박사를 데려오는 데 성공한다. 이후에도 당시 해군성 차관 댄 캠블은 "첸 박사 추방은 미국 정부가 저지른 가장 우매한 처사였다"며 두고두고 후회했다.

안화용 한국연구재단 성과확산실장은 “중국은 첸 박사 사례에서 보듯 역대 국가 지도자가 한결같이 과학인재를 국가의 보물처럼 아끼고 예우하는 문화가 존재한다. 국가주석을 비롯한 고위급 지도자들 중에는 이공계 출신이 많다는 특징도 주목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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