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육을 왜 하나? 사람답게 살아가는 착하고 좋은 사람 만들자고 한다. 당연한 대답이다. 그러면 교육 많이 받았다는 사람들 중에서 나쁜 사람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많은 이유는 무언가? 전문가라도 쉽게 답하기가 어렵다. 전문가들이 정말로 대답을 못하는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음에도 평생을 착하게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민초들의 인격은 어떤 교육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교육학자 김인회 교수가 '살며 생각하며'를 통해 던지는 한국교육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들을 만나보자.

내가 무당연구를 시작하게 된 것은 1968년 5월 말경 어느 학술토론모임에서 당한 수모 때문이었다. 우리 하고는 문화적 토양도 역사도 다른 서구 선진국들에서 개발된 교육학 이론들을 갖고 와서 한국 교육에다 적용하려 드는 교육학계의 풍토가 과연 건강한 것인가 하는 문제 제기를 한 나의 발표 내용에 대해서 어느 선배 교수가 "저 사람의 말은 들을 때에는 뭐 있는 것 같은데 다 듣고 나면 무슨 소린지 종잡을 수 없는 무당의 지껄임 같다."는 혹평을 할 때 청중들이 웃었고, 모임이 끝난 다음 회식자리에서도 나의 공격을 받았던 학파의 친구들이 일부러 나를 찾아와서 "어, 김무당 한잔 받아" 하고 낄낄대면서 번갈아 잔을 권할 때 머리 속에 번개처럼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어쩌면 요즘 같은 교육이 없었을 적에 한국 사람들을 가르친 것은 무당이었을 수도 있겠구나. 너희들이 나를 모욕하려고 무당이라고 불렀지만 내가 무당의 교육학이 어떠한지 연구해서 한 번 본때를 보여 주마"

다음 날 부터 인사동 고서점 거리를 누비면서 무당과 관련되는 책이면 무조건 사 모으기 시작했다. 5대 째 기독교 가문에서 자랐고 중등 고등교육을 기독교학교에서 받은 내가 무당에 대해 알 턱이 없으면서도 젊은 날의 철딱서니 없고 건방진 치기로 달려든 것이다. 무당과 관련되는 연구물들을 찾아 교육학적 해석만 하면 되겠거니 하는 터무니없는 나의 망상은 그러나 여지없이 무너졌다.

첫째는 이능화 최남선 손진태 임석재 장주근 김태곤 등 한국인들이 무당과 관련해서 출판한 논문이나 저서는 그 때까지 불과 한 줌 밖에 안 된다고 할 정도로 분량과 내용이 적고 허술한 편이었다. 둘째는 일본인들이 한국 무속과 무당에 대해 조사하고 연구한 내용이 엄청난 분량의 출판물로 나를 압도 했던 것이다. 결국 무당은 만나 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문헌자료 만으로 무당을 연구 하려니 무당의 노래를 모아놓은 손진태와 무라야마의 자료를 탐독하게 되었고 무당연구를 시작한 지 3년 여 만에 '무가와 찬송가의 비교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을 학교 논총에다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어려서부터 내가 익숙한 것이 찬송가이니 무가와 비교해 보면 재미있을 듯해서다.

얼마 후 같은 학과의 선배 교수 한 분으로부터 임석재 교수가 우리 선생님인데 당신 논문을 읽고 한 번 만나고 싶다 하셨으니 아무 날 아무 시에 경복궁 건춘문 앞으로 가 보라는 전갈을 받았다. 내가 무당을 찾아다니면서 한국무속 현장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계기는 임석재 교수와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그 이후 오늘날까지 나의 무당연구는 계속 되었다. 1980년대 초 부터는 무속의례 현장을 비디오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지난 해 1월에 1970년 이래 채록 수집해 온 무속관련 영상, 음성, 사진자료 257건 3238점 자료를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했다. 요즘의 젊은 세대 무속 연구자들이 30여 년 전에 찍은 현장 동영상자료들을 찾는 경우가 잦아지기에 취한 조치이다.

*** 김인회 교수는....
연세대 교육학과를 나와 동대학원에서 석박사과정을 마쳤다. 1969년 이화여대에 부임했고 1980년 연세대로 자리를 옮겨 2003년 정년퇴임했다. 한국교육사학회 회장, 연세대 박물관장, 한국교육철학회 회장, KBS객원해설위원, 혜곡최순우기념관 관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재)내셔널트러스트문화유산기금 이사장, 한국박물관교육학회 명예회장을 맡고 있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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