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21대 왕 영조, 성균관에도 탕평이념 구현 희망

『우리나라 근대 고등교육의 역사는 1945년 8.15 광복 이후 시작돼 올해로 70년이 된다. 100년이 채 되지 않는, 서양에 비해 초라한 역사라고 단정지을 일이 아니다. 우리 대학의 70년은 수많은 동량을 배출해 압축 경제성장을 견인하고, 국가의 첨단산업을 이끄는 비전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이룩한 놀라운 역사이기도 하다. 학령인구의 감소에 따른 대학구조개혁으로 인해 대학인의 자부심이 날로 추락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대학신문은 대학 70년 역사를 통해 ‘한국대학의 유산’을 선정함으로써 우리 대학이 세계로 미래로 나아가는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다. '한국대학의 유산'은 역사적인 인물과 사건, 정책, 장소, 유적 등을 총망라한다. -편집자 주』

 당파 간 논쟁 조차 제재… 정치적 무관심 초래, 사기 사라져
“탕평정치 사실은 이념·세계관 다른 사람들 간 소통 위한 것”

[한국대학신문 정윤희 기자]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 성균관의 유생들은 각종 정치 현안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붕당정치가 활발할 때에도 성균관은 유교의 수호자이자 공론의 수렴처로서 국왕과 조정으로부터 독립된 정치 활동 영역을 보장받고 있었다. 이는 장차 예비정치인으로서 활약할 그들의 ‘사기(士氣)’를 고양시키기 위한 일종의 전통이었다. 유생들은 뜻을 모아 상소를 올리는 ‘유소(儒疏)’는 물론 주장이 관철되지 않았을 때는 일제히 성균관을 비우는 ‘권당(捲堂) 또는 공관(空館)’ 등을 통해 정치적인 의사를 적극 개진했다. 또 유생들의 자치모임을 운영했으며 유생 대표도 선출했다. 유생들이 스스로 정한 벌칙 시행 등을 통해 조직의 기강도 유지했다.

왕세자 시절부터 극심한 붕당정치 폐해를 경험한 영조(1694~1776)는 즉위 직후 ‘탕평정치’를 국정과제로 삼고, 예비 관료를 양성하는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 성균관에서도 구현되길 바랐다. 이때부터 전통적인 성균관 유생들의 정치참여 방식에 변화의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 '성균관에 탕평비를 세우다'의 의미는 = 1742년(영조 18년) 3월 26일, 왕세자가 성균관에 입교하던 날 성균관 반수교(泮水橋)에는 비석 하나가 세워졌다. ‘편당을 짓지 않고 두루 화합함은 군자의 공평한 마음이요, 두루 화합하지 아니하고 편당을 지음은 소인의 사심이다(周而不比 君子之公心, 比而不周 小人之私意)’는 문구가 새겨진 탕평비였다.

영조는 이렇게 탕평의 실천 여부로 군자와 소인을 구분했다. 유교경전인 서경의 '무편무당 왕도탕탕(無偏無黨 王道蕩蕩) 무편무당 왕도평평(無偏無黨 王道平平)'에서 유래한 탕평은 숙종대 학자 박세채(朴世采)에 의해 본격적으로 제기됐고, 영조에 이르러 국정과제로 정치현장에 전면 등장했다. 영조는 왜 탕평을 국정과제로 채택한 것일까.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극한대립에 살육이 자행되고 왕권마저 당쟁에 이용당하는 상황에서 즉위했다. 영조의 왕세자 책봉을 도운 노론은 1721년 소론에 의해 화(辛壬士禍)를 입은 후, 영조 후엔 대대적인 소론 탄압에 나섰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성균관 유생들은 영조가 즉위한 직후인 1725년에만 11번의 상소와 3번의 집단행동을 취했다.

탕평정치는 누구보다 당쟁의 폐해를 뼈저리게 인식하고, 과거의 과오를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영조의 의지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붕당정치 혁파를 앞세운 영조의 탕평 정책은 유생들의 정치참여를 제한하는 결과를 낳았다.

▲ 탕평비는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성균관대 입구에 위치해 있다. 일명 어서비각(御書碑閣)이라고 한다. 1742년(영조 18년) 왕세자가 성균관에 입교한 것을 기념해 당부의 말을 돌에 새겨 반수교 옆에 세웠다(제공=성균관대).

■ ‘당파(黨派) 벗기’ 동참 독려… 유생들의 정치적 무관심 초래 = 그렇다면 영조는 왜 탕평의지를 대변하는 탕평비를 하필 성균관에 세운 것일까. 성균관은 공자와 그 제자들의 위패가 모셔진 문묘(文廟)의 수호 기능도 해 왔지만, 대과 시험을 통해 중앙관리로 진출하는 즉 예비중앙관리의 최종 교육기관이었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박현순 교수는 이에 대해 “왕권을 정점으로 한 관료국가체제를 회복하고자 했던 영조가 성균관 유생에게도 당론을 벗어나 탕평정치에 동참하도록 요구한 것”이라며 “반수교에 탕평비를 세운 것은 이를 대변하는 사건”이라고 풀이했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도 “영조는 예비관료 집단인 성균관 유생들이 ‘탕평’의 이념을 항상 염두에 두어서 향후 탕평정치의 주역이 될 것을 희망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영조의 탕평의지는 뜻밖에도 성균관 유생들의 정치활동 제약과 정치적 무관심을 초래했다. 영조는 성균관 유생들의 의견이 당파 간 의견과 다르지 않다는 즉 당습(黨習)에 젖어 있다고 보고, 정치성을 내보일라치면 성균관 유생들의 임원이나 상소문 대표자를 처벌해 성균관 유생들로 하여금 정치색에서 벗어나길 바랐다.

실제로 1727년(영조 3) 소론이 정국에 다시 등장할 당시, 소론계 인사들의 처벌을 요구하는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도 영조는 단호하게 대처했다. 성균관 유생 한덕옥(韓德玉)은 “영조가 흉당의 처벌은 뒤로 한 채 붕당 타파에만 힘쓰고 있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고, 이에 영조는 “한덕옥이 오히려 당의 구습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답했다.

유생들은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성균관에서 나가는 집단 행동인 ‘권당’에 돌입했고, 이 과정에서 영조는 한덕옥 등에게 2년 이상 과거 시험에 응시할 수 없도록 조치를 내렸다.

또 1745년(영조 21) 유생들은 영조가 세자에게 내린 교훈서 ‘어제상훈(御製常訓)’의 자구를 문제삼은 상소를 올렸다가 대표자 등을 서인(庶人)으로 강등시키고, 당시 상소문 대표자의 부친 외 7명까지 국문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일은 유생들의 ‘사기(士氣)’ 저하뿐 아니라 정치활동의 심각한 위축을 불러왔다.

박 교수는 “유생들은 장래 관료가 될 사람이라 선비의 기상 ‘사기(士氣)’, 기개를 키워줘야 한다는 것이 전통적인 인식이었고, 유생들의 자율적인 정치참여 방법에 대해서도 누구나 동의했다”면서도 “그 활동 범위에 대해서는 사대부와 국왕과의 생각이 달랐던 것”이라고 말했다.

유생들 입장에서는 어렸을 때부터 교육받은 이념·세계관을 영조가 사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제재를 가하려 했기 때문에 아무리 왕의 탕평의지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측면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영조대 후반으로 가면 갈수록 성균관 유생들이 정치적 견해를 표출하는 일도 없어졌고, 이로 인해 국왕과 충돌하거나 유생들끼리 충돌하는 일도 없어졌다”면서 “성균관은 과거 시험을 위한 강학 장소로 변화해 ‘평온한’ 상태를 유지했고 정치적으로 무관심해졌다”고 설명했다.

■ 훼손되는 대학의 자율성, 사라진 대학생의 ‘기개’ = 성균관 유생들의 정치적 참여위축이란 뜻밖의 결과를 불러일으켰지만 성리학 이념 안에서 사회와 세계를 상이하게 인식하던 당파간의 깊은 골을 혁파하고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해 나가는 구조를 만들고 싶어했던 영조의 의지는 그대로 그안에 녹아있다.

오늘날 대학구조개혁과 취업난 속에 대학의 자율성과 학생들의 사회참여는 갈수록 희미해져 간다는 지적이 있다. 2015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각 대학 총장들의 신년사에 담긴 다짐은 학문의 자유와 진리탐구에 대한 열의보다는 정부가 대학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체질을 개선하기 위해 강력히 추진하고 있는 대학구조개혁 풍파에 맞서기 위한 결의를 다지는 데로 모아진다.  

지금 대학들은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자부심을 잃고 취업률 올리기에 급급한 학위·연수기관으로 변질됐다고 자조하고 있다. 학생들도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고뇌의 시간도 없이 취업스펙 쌓기에 열중한다. 

이근호 명지대 인문과학연구소 교수는 “극심한 붕당정치기에도 옛 유생들은 학문에 정진하면서도 당리당론(黨利黨論)에 맞추기 보다는 대중적 차원에서 사회문제를 비판하거나 국정에 대한 방향 제시를 한 측면에 있었다”면서 “오늘날 대학의 기능과 맞물려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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