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영 고려대 교수 정년퇴임 기념 사진전 '나의 고대 나의 사진'

[한국대학신문 이재 기자] 김호영 고려대 교수(65·기계공학과, 사진)는 여유있는 모습으로 기자를 맞았다. 정년퇴임을 앞둔 노교수의 연구실에는 30여년의 삶이 가득했다. 책장을 빼곡히 메운 책을 비롯해 김 교수가 40년 넘게 찍은 사진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김 교수는 9일부터 열리는 사진전 준비로 연구실이 지저분하다며 멋쩍어했다. 고려대 68학번인 김 교수는 입학 뒤 줄곧 사진을 찍었다. 50여년의 대학 역사다.

▲ 고려대 김호영 교수는 9일부터 14일까지 고려대 자연계캠퍼스 하나스퀘어에서 '나의 고대 나의 사진'을 주제로 정년퇴임 기념 사진전을 개최한다. 김 교수가 50여년간 고려대에 머물면서 찍은 100여점의 사진이 전시된다. (사진=한명섭 기자)

김 교수는 9일부터 14일까지 6일간 고려대 자연계캠퍼스 하나스퀘어에서 ‘나의 고대 나의 사진’을 주제로 정년퇴임 기념 사진전을 개최한다. 전·현직 교수 사진 44점을 포함해 약 100여점의 사진이 전시된다.

전시할 흑백사진 중 하나엔 ‘뽀빠이’ 이상용 씨가 찍혀 있다. 1969년의 이 씨는 등근육이 늠름했다. 이 씨가 고려대를 졸업한 뒤 69년도 ‘고연전(고려대·연세대 정기전)’에 참가한 사진이다. 68년까지 고려대 응원단장이었던 이 씨는 졸업한 뒤 고연전에 참가해 후배들을 응원했다. 김 교수는 “이 씨가 그렇게 웃긴 개그맨이 될 줄 몰랐다”고 말했다.

당시 고연전은 지금은 사라진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렸다. 카메라가 귀한 탓에 김 교수를 비롯한 ‘호영회(虎影會)’ 멤버들은 늘 환대를 받았다. 호영회는 1966년 고대사진부라는 이름으로 결성됐다. 4기 멤버로 호영회에 가입한 김 교수는 ‘고대사진부’라는 이름이 촌스럽다고 느꼈다. 당시 대학가에는 연세대 사진부 ‘연영회(延影會)’를 비롯해 숙명여대 사진부 ‘숙미회(淑美會)’ 등이 활동했다. 이를 본따 김 교수는 고대사진부를 호영회로 바꿨다. 고려대의 상징인 호랑이 호자에 그림자 영자를 썼다. 바꾸고보니 김 교수의 이름과 같았다.

사진의 기본기는 호영회에서 본격적으로 익혔다. 그가 처음 쥔 카메라는 펜탁스의 스포매틱 SP기종이다. 입학 기념으로 부모님이 사줬다. 이후 니콘의 기능이 좋아 곧 교체했다. 지금까지 수십종의 카메라를 썼다. 지금도 30여대의 카메라를 소장하고 있다. 김 교수는 학회 출장을 떠날 때 꼭 2기 이상의 카메라를 가져간다. 카메라 1기가 고장나도 바로 찍어야 하기 때문이란다.

호영회는 대학가의 다양한 사진을 찍었다. 대학가의 화두가 곧 사회의 화두가 됐던 시절이다. 5월 대동제는 그대로 민주화 시위와 이어졌다. 학생들이 모이면 전의경이 출동했다. 캠프파이어의 불길도 필름에 담겼고, 지금은 사라진 ‘차전놀이’도 흑백사진 속에서 재연됐다. 김 교수의 셔터는 프로못지 않게 역동적이었다. 60~70년대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김 교수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김 교수는 오는 28일 퇴임을 앞두고 있다. 그가 가장 애착을 갖는 사진은 어떤 걸까.

“지금도 카메라를 챙겨 찍는 장소가 있다. 고려대 애기능이다. 배움과 삶의 터전이었다.”

애기능은 고려대 자연계캠퍼스 중앙에 있다. 과거에는 교양학부가 있었고, 지금은 연구실이 애기능 옆 창의관에 있다. 김 교수의 47년 고려대 삶의 중심이다. 지금도 김 교수는 종종 카메라를 챙겨 옥상에서 애기능을 내려다보며 사진을 찍는다. 애기능을 담은 같은 구도의 사진에는 다양한 계절색과 변해가는 애기능 인근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4점의 사진 속에 찍힌 학생들의 옷차림도 세월을 실감케 한다. 애기능을 제외하면 김 교수는 애써 출사지를 찾지 않는다.

“사진은 찍는 사람의 가치관을 투영한다. 같은 출사지에서 같은 구도로 찍어도 사진마다 느낌이 다르다. 그 사람의 가치관이 담기기 때문이다."

김 교수가 최근 주로 사진을 찍는 곳은 학회 출장차 찾은 해외다. 포르투갈 리스본의 트램철길과 크로아티아 드보르닉 등이 그의 사진에 담겼다. 리스본의 트램철길은 이번 사진전에 내건 첫 사진이다. 김 교수는 “트램철길 교차로를 찍었다. 곡선으로 휜 것이 인생을 묘사한 것 같았다. 고려대에서의 삶을 지나 이제 새로운 철길과 맞닿게 됐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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