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미국, 영국 등 세계 각국의 대학들은 공동구매 활발

공동구매는 재정 효율적으로 운영해야하는 대학의 책무이기도

『자본과 규모를 갖춘 대학들이지만 ‘호갱(어수룩한 소비자)’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일부 대학들이 뒤늦게 불공정한 구매·건축 분야 유통구조를 깨닫고 대응을 고심하고 있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외부 환경은 더 팍팍하다. 올해 학부등록금을 올린 대학은 한 곳도 없다. 애초 인상안을 내놨던 대학마저 정부의 압박에 하루아침에 철회했을 정도로 여론은 싸늘하다. 부족한 재원 마련 방안을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하다. “경비 절감과 경영 효율화”를 내걸었지만 속내는 복잡하다. 재정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인건비는 노동 윤리와 맞물려 재정 논리만 들이댈 수 없는 노릇이다. 대학들이 최근 구매·건축 분야 비용절감 방안을 놓고 부심하는 배경이다. 구매·건축 분야에서 대형 소비자인 대학은 ‘갑’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반대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독점 유통구조와 오랜 관행, 폐쇄적인 정보공유 등으로 대기업과 유통업자의 손쉬운 먹잇감으로 전락했다는 자성이 터져 나온다. 한국대학신문은 ‘거대한 호갱’이 되어버린 대학들의 현실을 3회에 걸쳐 진단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해 본다. -편집자 주』

글싣는 순서
<상> 소비자 권리상실한 대학
<중> 경영논리로 풀어보는 구매전략
<하> 공동대응 방안을 찾아라

[한국대학신문 이우희·손현경·이재익·김소연 기자] 대학가의 공동구매 움직임이 가사화하고 있다. 각종 총장협의회 중심으로 공동구매가 주요 안건으로 올라 논의되고 있다. 대학들은 공동구매의 필요성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해외에서는 각국의 사정에 맞는 다양한 방식으로 공동구매가 활성화 돼 있다. 일본은 생협이 중심이 되어 강력한 공동구매 플랫폼을 구축하고 있으며, 미국은 민간사업자가 주도해 치열한 공동구매 플랫폼 경쟁을 펼치고 있다. 공동구매 분야는 PC부터 사무용품 등은 물론 교직원 연수와 여행, 보험, 법률서비스까지 매우 광범위하다. 우리 현실에 맞는 공동구매의 방법과 전략에 대해 국내 대학 총장들의 다양한 의견을 제시했다.

■ 대학가 공동대응 ‘시동’…앞서가는 경기서남권 = 경기서남권 중소 규모 강남대, 성결대, 평택대, 한세대, 한신대, 협성대 6개 대학은 지난해 12월 경기서남권 총장모임을 갖고 ‘규모의 경제’를 통해 힘을 합치기로 했다. 이들 대학은 사회봉사를 비롯한 취업, 입시, 행정 업무 분야에서 적극적인 교류협력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 1월에는 4가지 협력 분야 실무 담당자들이 모여 1차 논의를 진행했다. 이들은 4개 분야 대표 단장을 선출하고 단장을 중심으로 사업계획서를 작성해 수립하기로 합의했다.

경기서남권 대학의 움직임은 낡은 생각을 뒤집는 ‘발상의 전환’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지역 대학을 경쟁상대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공동의 협력자로 여긴 것이다. 한세대 평가예산팀 관계자는 “우리 6개 대학이 전향적으로 사고를 전환해 긍정적인 사례가 되길 바란다”면서 “이를 계기로 다른 대학들에도 파급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위기의식도 협력의 필요성을 높였다. 6개 대학은 지난해 교육부 재정지원사업에서 모두 고배를 마셨다. 수도권특성화대학(CK) 선발에서 모두 탈락했고, 산학협력선도대학(LINC) 육성사업에 신청도 하지 못했다. 인문사회계열 중심의 학과 편제 특성상 산학협력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대학 구조조정으로 학과 정원은 감축해야 함에도 재정지원은 받지 못하는 벼랑 끝에 내몰린 처지가 됐다.

이에 경기 서남권 6개 대학은 1차적으로 △대학의 사회적 책무 강화를 위한 사회봉사 분야 △인재들의 사회진출을 위한 취업 분야 △안정적 신입생 확보를 위한 입시분야 △예산 효율성 제고를 위한 소프트웨어 구매·계약 분야에서 공동대응하기로 한 것이다.

▲ 지난 5일 전문대학 총장들이 ‘2015년도 WCC 21 총장협의회 간담회’를 열고 올해 계획 및 발전 방향을 논의하며 전문대학들도 공동구매에 대해 실질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 “우리도 해보자”…지역별, 협의체별 논의 활발 = 조금 늦었지만 최근에는 각 지역 총장협의회를 중심으로 공동구매 논의가 활발하다. 최근 몇몇 서울 지역 대학 총장들도 공동구매 방안이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회원교간 탄탄한 협력체제로 유명한 전문대학 WCC 총장협의회도 최근 공동구매를 정식으로 논의했다. 경상대 창원대 경남과학기술대 등 경남지역 국립대 3곳도 공동협력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그 밖에 가까운 대학끼리 특정 분야에 대한 협력을 논의하는 경우도 많다.

다만 4년제 대학들은 아직까지 전체적으로 신중한 분위기다. 서울지역 대학의 한 총장은 “서울지역 총장들이 모이거나 사립대학총장협의회에서 대학 경영난에 대한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회자되고 있다”면서 “대학 총장들이 만났을 때 힘을 합쳐서 공동구매 등 이런 대응하자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아직까지 공식 논의 테이블에 올리기엔 현실이 녹록치 않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마다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공동구매 등이 예산절감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이뤄지지 어렵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고 덧붙였다.

충청지역 대학의 한 총장은 “대학들이 필요로 하는 물자에 대한 공동구매라면 대체로 찬성일 것”이라면서도 “각 대학마다 이미 주 거래처가 있기 때문에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다만 공동대응에 나서야 한다는 일종의 당위성에 대해 합의가 이뤄지고, 이후 교육부나 대교협 같은 기관이 공동구매를 강제한다면 지금 겉으로는 망설이는 대학들도 결국 동참하게 될 것”이라고 분위기를 설명했다.

조선대 관계자는 “광주시내에 있는 대학끼리는 서로 남는 교육공간을 공동으로 사용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며 “과거에는 학생들간 자존심 문제도 있고 문화차이가 컸지만 재정위기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시설 공동활용뿐 아니라 기자재의 공동구매·활용도 논의할 때가 무르익었다고 본다”고 말했다.

전문대학은 공동구매 아이디어에 4년제 대학에 비해 보다 적극적이다. 이기우 인천재능대학 총장은 “대학은 필요한 물품이나 필요한 내용들이 대동소이하다”며 “대학별로 재정을 아끼는 차원에서 공동구매 제도가 마련된다면 좋을 것 같다”고 긍정적인 생각을 밝혔다.

최재혁 경북전문대학 총장도 “전문대는 기존에 4년제와 달리 지역별 공동구매 협약 움직임이 없었다. 그러나 공동구매를 함으로서 저렴하게 물품을 구매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제안”이라며 “다만 현실적으로 경쟁관계인 지역대학들이 공동으로 연합하기란 쉽지 않으므로 공동구매는 국립대가 먼저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 시장논리 십분 활용…혜택 누리는 해외대학들 = 공동구매에 있어 해외대학들은 멀찌감치 앞서가고 있다.

일본은 대학생활협동조합(생협)이 강력한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공동구매까지 관장하고 있다. 아시아 최초로 협동조합 모델을 받아들인 일본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대학 생협이 질적, 양적 측면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다. 일본 생협은 초기부터 공동구매에 중점을 뒀다. 1946년 도쿄대, 와세다대, 게이오대 등에 소비자조합이 설립됐고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공동 구매 사업을 통해서 조합의 역량을 키워갔다.

이후에 사업 규모가 커지고 생활협동조합 회원이 늘어남에 따라 △경리 및 회계 △상품 구입 △점포 신설 및 지원 등의 사업을 수탁 받아 운영했다. 이들은 주로 전문 서적 및 교과서 사업, 교재나 문구, 컴퓨터, 식품 등의 공동 구매를 추진하고 있다. 그 외에도 일본 생협은 테마여행사업, 학생공제사업, 기타 서비스사업까지 활동 폭을 넓혀 ‘운영의 묘’를 살리고 있다.

미국은 민간 공동구매 업체의 춘추전국시대라 불러도 좋을 만큼 다양한 업체가 난립해 경쟁하고 있다. 공동구매는 ‘스타트업’의 창업 아이템으로도 인기가 높아, 충분한 규모의 회원기관을 모집하는 것이 성공의 관건으로 작용하는 상황이다. 때문에 미국의 공동구매 사업자들은 제품의 선택과 서비스보다는 영업을 통한 회원기관 확보에 기업의 역량 대부분을 투자하고 있다. 이에 비춰 우리나라는 조달청을 제외한 공동구매 논의가 지지부진한데다, 종합대학이 대부분일 정도로 규모가 커 공동구매의 성과를 이루기 더 유리한 상황일 수 있다.

미국은 대학이나 공·사립 초중고교, 병원, 연구소 등 대부분의 기관이 복수의 공동구매 단체에 회원으로 가입해 구성원들의 소비 권리를 향상시키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대학은 '협력·공동구매 프로그램'에 대해 "추가적인 가격협상이 필요 없이 저가의 구매계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서 "주립기관이자 고등교육기관으로서 텍사스오스틴은 다양한 협력 또는 공동구매 프로그램에 참가할 자격을 갖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어 자신들이 계약한 공동구매 업체의 이름과 소개를 홈페이지에 공개하고 있다. 안내된 공동구매 업체는 11개에 달했다.

영국에선 비영리단체인 런던지역대학구매협회(LUPC, London Universities Purchasing Consortium)의 활동이 돋보인다. LUPC는 런던대, 런던정경대, 런던비즈니스스쿨, 왕립예술대, 트리니티대, 킹스턴대 등 대학들과 런던박물관과 동물원협회, 런던기록보관소 등 지역기관을 정회원으로 두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협력회원으로 법률서비스, 세미나 및 여행, IT제품, 보험, 유지보수, 청소, 보안, 웹사이트 관리 등 다양한 분야의 단체와 기업을 끌어들여 회원사 모두의 구매력과 전문성을 활용한 공동이익을 누리고 있다는 점이다.

공동구매는 대학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길용수 한국대학경영연구소 소장은 “대학은 학생들이 낸 등록금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책임이 있으며, 나아가 다양한 수익사업을 통해 대학수입의 증대를 위한 도전경영도 요구되고 있다”고 말했다. 미 텍사스오스틴대학은 합리적인 물품구매를 대학의 책무이자 권한으로 학칙에 규정하고 있다. 이 대학는 구매 부서 홈페이지에 "우리의 임무는 양질의 서비스로 대학 본연의 기능인 교육과 연구를 지원하는 것"이라며 "연방과 주, 대학의 법률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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