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교육은 정말 중요합니다. 영화를 통해 인권에 대한 문제 의식을 한 +가지만 느낀다면, 자신과 주위 사람을 대하는 자세가 변할 것이고, 그런 사람이 늘어날수록 우리 나라도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영화로 인권을 얘기하는 중앙대 이충직 교수(영화학), 지난해 이 교수는 +인권영화제를 '사수'하기 위해 홍익대에서 영사기를 들고 경찰과 숨가쁜 +추격전을 연출했다. 영화 한편을 상영하기 위해 벌인 숨바꼭질 같은 '놀이'(?)는 우리 나라 인권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예에 다름 아니다.

지난 96년 시작된 인권영화제. 이 교수는 인권영화제의 집행위원이다. 해마다 공권력의 간섭을 받은 덕에, '시련'으로 단련된 인권영화제와 3년을 함께 해오고 있다.

인권영화제는 집행위원과 자원봉사자가 구별되지 않는 행사다. 다른 +영화제와는 달리 행사가 초읽기에 들어가면 나이와 직위에 상관없이 실무에 매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거듭될수록 몸은 고되지만, '인간 권리'의 가치는 더욱 묵직하게 다가온다. 머리로만 인식했던 인권의 당위와 중요성은 영화제를 통해 몸과 마음으로 느끼게 되었다.

이 교수는 영화계의 그림자와 같은 이다. 도드라지지는 않지만 늘, +영화관의 한 축을 든든하게 받치고 선 받침목과도 같다, 중앙대 영화학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크고 작은 영화제와 영화계 이슈를 유심히 살펴온 이들에겐 익숙한 인물이지만, 배우나 감독, 평론가들에 관심을 +쏟는 일반인에겐 불혹의 이 교수는 낮선 사람이다.

인권영화제 집행위원회에 속하기 전, 이 교수의 직함은 제1회 +국제독립영화제 조직위원장이었다. 그리고 이전부터 비디오 영화에 관한 사전심의가 사라질 때까지 '영화 검열 철폐'를 부르짖는 교수였다.

비주류 영화의 중심에 서 있는 것에 대해 이 교수는 "흘러오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라고 밝히지만, 이들 영화와의 인연은 영화전문지 +『영화언어』를 창간하던 때의 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의식이 몸밖으로 나온 것은 지난 80년대 말의 『오! 꿈의 나라』'불법 상영'과 깊은 관계가 있다.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강사로 활동하던 때, 그 유명한 '불법 상영'에 적극 관여했다. 그렇게 맺어진 끈끈한 인연은 이교수를 독립영화협의회 고문으로 앉혀놓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다. 영화에 대한 사랑이다. 영화관에 +발을 담근 이 가운데 화화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이 교수의 독특함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그 사랑을 실천으로 끌고간 데 있다, 영화인에게 영화 창작과 표현에 간섭이 있다는 것보다 심각한 공공의 폭력은 없을 터이니.

90년대 전후엔 비판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가르치는 사람이 반골적인 발언을 하고, 반할리우드적인 영화에 치우쳐 있다'는 것.

이 교수의 전공은 영화제작. '강단에 너무 일찍 선 것이 후회스럽다'는 발언이다.1년간 강단을 떠나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에서 연출부와 다역 엑스트라로 활동했다는 전력을 밝히는 대목에서 제작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 이루지 못한 꿈도 영화 제작과 연관된다.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것과 제자 중에 세상을 뒤흔들만한 인재가 나오는 것. 이것의 이 교수의 꿈이다. 눈빛에선 두 희망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확신이 넘쳐난다.

"지난 여름, 영화과 학생들과 프랑스에 다녀왔습니다. 저는 학생들에 대해무척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책임감이나 순발력, 성실함, 용기 등 제가 보지 못했던 개개인들의 장점이 있었습니다"

희망을 위해 넘어야 할 가장 높은 산은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간이다. 일복을 타고난 듯, 학과장을 비롯해 대학에서 맡은 보직만 3개. 그나마 +지난해보다 줄어든 것이다. 하지만 신입생 선발로 어수선한 요즘 같아선 하루 24시간은 공무 처리에도 빠듯하다.

내년이며, '내 시간'에 대해 갈증이 해갈될 수도 있다. 안식년차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안식년에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영화제작, 시나리오와 연출을 직접 맡은 작품의 내년 제작 가능성은 40%. 그 영화는 아버지 세대를 그린 작품일 수도, 원초적인 감정을 제대로 살린 공포물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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