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첩보영화에서 보면 살인의 명수들을 거느리고 무시무시한 음모를 +꾸며나가는 조직의 최고 우두머리는 끝내 얼굴을 안 보여준다. 흰 고양이를 안고 털을 쓰다듬는 하반신 모습만 있을 뿐 얼굴은 가려져 있다.그리고 이 모습은 신체가 아니라 화면의 영상일 뿐이다.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서 그는 부하의 보고를 받고 지령을 내린다.

첩보전 영화는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운영되는 대학도 있다.

그 실력자는 대학을 철저하게 구석구석까지 관리하지만 총장은 아니다. 이 대학에서 총장은 다만 캠퍼스를 장식하는 한그루의 꽃나무일 뿐이다.

이 대학은 꼭두각시 인형극장과 같다. 인형극장에서 관객은 인형만 볼 수 있을 뿐이지 그들을 줄로 묶어서 조종하는 주인은 볼 수가 없다. 이 대학도 그렇다. 학생은 물론이요, 조종당하는 꼭두각시 인형들까지도 주인얼굴을 거의 볼 수가 없다. 그는 거의 1년 열두달 아주 멀리 미국에 가 +있다는 소문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인이 왜 거기에 가 있는지는 대한민국에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는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 대학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매일 보고 받고 지령을 내린다. 아직은 화상회의까지는 가지 못했으니까 흰 고양이를 안고 나와서 하반신만이라도 보여주지는 못하지만구식 전화기와 팩스만으로도 모든 것이 잘 진행된다. 마치 발 하나 쳐놓고 소위 수렴청정하는 왕대비와 새끼 임금의 경우처럼 거리가 가까운 셈이다.

그런데 그 보고와 지령이 총장과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총장은 다만 남들이 봐주기만 하면 되는 꽃나무일 뿐이다.

얼굴없는 주인으로부터의 지령을 직접 받는 곳은 총장실 옆방의 재단사무실이다. 그런데 재단이사들도 총장과 마찬가지로 꽃나무이거나 아주 쓸모없는 말단 조역 꼭두각시일 뿐이다.

재단사무실에서 주인의 지령을 직접 받는 사람은 따로 있다. 주인의 신임을 받는 혈육이지만 그 역시 다음 실무자들에게 지시를 전달하는 인간통신중개소일 뿐이다.

이 대학에서는 이처럼 총장 학장 재단이사 심지어 주인인 이사장까지도 그런 감투이름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이사장이 되든 말든 지하에 은밀히 깔아놓은 전화케이블선만 쥐고 있으면 얼굴이 없어도 그가 주인이다. 그러므로 이사장직을 취소해봤자 그것은 다만 거울 속의 허상을 깨뜨리는 효과밖에 없을 것이다.

- 김우종 (본지주필/문학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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