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인(본지 논설위원/춘천교대 교수)

최근 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가 번역, 발간되었다. 1965년 미국에서 발표된 작품인데,  한참의 세월을 뛰어넘어 얼마 전 유럽에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고 한다. 이 책에 대한 소개는 이렇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문학을 사랑했으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고자 했던 윌리엄 스토너, 세상의 기준에서 실패자와 다른 없는 삶을 산 한 남자의 이야기'

평범한 주인공 윌리엄 스토너의 직업은 교수다. 교수로서 같은 직업을 가진 이의 인생을 담담하고도 세밀하게 묘사한 소설을 보는 감회가 남다르다. 매일 가르치고 연구하는 일상을 천직으로 생각하지만, 가족과 동료로부터 고립되어 살다 끝내 병마로 쓰러진 스토너의 인생을 좇다 보면 무엇보다 교수로서의 철저한 직분의식에 찬탄하게 된다.

'그는 수업준비를 하거나 과제를 채점하거나 논문을 읽는 시간을 제외하면, 항상 연구를 하고 글을 썼다. 세월이 흐르면 자신도 학자이자 교육자로서 명성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특별할 게 없어 보이는 문장들이었지만, 오래도록 눈길이 머물렀던 대목이다.

얼마 전  ‘지금, 대학교수로 살아간다는 것’이라는 주제로 한 설문조사가 화제가  되고 있다. 이 설문조사에 따르면 80% 이상의 교수가 대학교수의 사회 위상이 낮아지고 있다고 답했다. 지식인도 죽었고 대학도 죽었다는 비판에는 70% 이상이 동감했다. 이제는 지식인이 아니라 ‘지식기사’라는 자괴감도 확산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 설문조사를 달리 읽어보면, 교수들이 아직도 사회 위상에 민감하다는 걸 감지하게 된다.    

대학이 대중화시대에 접어들면서 위상이 낮아진지 오래건만, 여전히 사회를 이끄는 최고의 엘리트이자 지식인이라고 자부해온 교수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니, 사회적 명예와 위신을 누리며 자족하던 지식인의 삶이 흔들리는 현실이 당혹스러울 것이다. 냉철하게 말하면, 사회적 명예와 위신을 ‘누리려고만’ 하면서 지식인으로 대접받길 원했던 교수 사회 풍토가 대학을 죽이는 데 일조했으니, 자업자득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의 대학은 학문도 없다' '교수만 되면 연구하지 않는다' '학생들에게 애정을 보이지 않는다' '교수가 교수다워야 대학과 학문이 발전한다'고 답한 교수의 일침이 더욱 따갑게 다가온다.     

교수의 직분을 표준화하고 수치화한 것이 교수업적평가다. 당연히 교육과 연구가 절대적 비중을 차지한다. 여기에 봉사활동이 더해 업적을 평가한다. 모든 대학에 해당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보직을 할 경우 일정한 봉사활동 점수를 준다. 하지만, 그 비중은 교육이나 연구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요사이 풍문에 따르면, 대학에서 총장을 비롯한 보직교수의 위세가 대단한 듯하다. 사회적 위상의 격하를 보상이라도 받으려 작심한 듯이, 여러 대학에서 보직교수들이 권력을 휘두르며 반지성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 게 어느덧 교수 사회의 일상이 되고 있다.    

보직이란 행정상 직책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한자를 잘 들여다보면 보직의 보(補)는 돕다, 고치다의 뜻을 갖고 있다. 동료 교수들의 교육과 연구를 돕는 게 바로 보직으로서 합당한 직무인 것이다. 지금의 풍토는 어떤가. 보직은 곧 권력자나 권력의 일원으로서 동료 위에 군림하는 자리가 되어가고 있다. 보직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교수는 교육과 연구에 몰두하는 교수와 삶 자체가 다르다. 보직교수들은 교육과 연구에 충실하려는 교수들을 도리어 학교에 기여하는 바가 없다며 본말이 전도된 비판을 하기도 한다. 보직을 교수의 직분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대학을 이끄는 한, 대학은 결코 위기의 늪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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