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여성교육기관 사회 분위기 반영 ‘한국적 가치’ 강조
‘가정·사회 양육’ 역할 분업적 사고 바탕 점진적 변화 거쳐
여성독립운동가 기관 설립 잇따라 “평생 완전 독립해 살라”

『우리나라 근대 고등교육의 역사는 1945년 8.15 광복 이후 시작돼 올해로 70년이 된다. 100년이 채 되지 않는, 서양에 비해 초라한 역사라고 단정지을 일이 아니다. 우리 대학의 70년은 수많은 동량을 배출해 압축 경제성장을 견인하고, 국가의 첨단산업을 이끄는 비전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이룩한 놀라운 역사이기도 하다. 학령인구의 감소에 따른 대학구조개혁으로 인해 대학인의 자부심이 날로 추락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대학신문은 대학 70년 역사를 통해 ‘한국대학의 유산’을 선정함으로써 우리 대학이 세계로 미래로 나아가는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다. '한국대학의 유산'은 역사적인 인물과 사건, 정책, 장소, 유적 등을 총망라한다. -편집자 주』

[한국대학신문 정윤희 기자] “자식들 교육시키기를 봄에 씨부리는 줄로 생각하기를 바라노라. 정부에서는 학교 몇 개를 시작해 아들을 가르치나, 계집아이 가르치는 학교는 없으니…(중량)…계집아이들은 조선의 아이가 아니며, 조선의 자식되기는 일반이거늘, 오라비는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권이 있으되 불쌍한 계집은 집에 가두어 놓고, 가르치는 것은 다만 사나이에게 종 노릇할 직무만 가르치니 우리는 그 계집아이들을 위해 분히 여기노라. 정부에서 사내아이들을 위해 학교 하나를 세우면 계집아이들을 위해 또 하나를 짓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 독립신문 1896년 5월 12일자 논설 中

1895년 고종은 홍범 14조와 교육입국조서를 발표했다. 지·덕·체육을 강조하면서 국가 중흥과 부강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이어 소학교령도 내려 모든 남녀에게 공적인 교육의 기회도 부여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전통적 유교질서가 뿌리깊게 자리한 가운데 학업을 명분으로 여식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놓기란 당시 인식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위의 독립신문 논설도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그대로 말해준다.

이제 더 이상 여성교육은 낯설지 않다. 남녀모두 교육의 기회를 평등하게 갖고 있는 오늘날, 그럼에도 여대는 전통에 기대어 존재한다. 현재 한국의 4년제 여자대학은 총 7곳으로 전체 대학의 3.5%를 차지한다. 이화(1946년)를 시작으로 덕성여대(1952)·숙명여대(1955)·성신여대(1981)·동덕여대(1987)·서울여대(1988)·광주여대(1996) 등이 각각 종합대학으로 승격됐다.

▲ 초창기 이화학당 학생들.

여성교육 기관 설립은 크게 △기독교계 선교사 △정부 △민간 인사 등으로 나뉜다. 1886년 우리나라 최초의 여학교 ‘이화학당’은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설립됐으며, 1906년 숙명여대(당시 명신여학교)는 조선 황실에서, 1908년 동덕여대(동원여자의숙)와 1920년 덕성여대(근화학원)는 민간자본으로 설립됐다. 여대의 존립에 위기감이 고조되는 지금, 그들 대학의 설립정신과 역할을 되새겨보고 대학구조개혁 풍파 속 여대의 향방을 고민해 본다.

▲ 1886년 서울에 설립된 이화학당 최초의 한옥교사.

■ 근대적 여성교육 ‘사립여학교’서 시작, 이화학당 ‘한국적인 기독교인’ 양성 = 우리나라의 근대적 여성교육은 사립여학교로부터 비롯됐다. 우리나라 최초 근대 여학교는 1886년 스크랜튼 부인이 세운 ‘이화학당’이다. 당시 기독교 사립여학교들이 지향했던 인간상은 ‘한국적 여성’과 ‘기독교적 여성’이다. 설립자 메리 F. 스크랜튼(Mary F. Scranton) 부인은 이화학당의 교육목적을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목표는 여아들을 외국인의 생활, 의복 및 환경에 맞도록 변하게 하는 데 있지 않다. 현지에서 우리 학생들의 생활 전부를 바꾸어 놓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분명 오해다. 우리는 단지 한국인을 보다 나은 한국인으로 만드는 것으로써 만족한다.(이하 생략)”

설립초기 설정한 이화학당의 교육목적은 당시 조선의 사회분위기와 맞물린다. 즉 유교질서가 공고한 사회에서 여성이 교육을 받기 위해 나들이 하는 것 자체가 쉽게 용납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또한 1882년 이후 강압적이고 불평등한 조약체결로 막대한 이권을 챙겨가는 서양인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도 작용했다.

이화학당는 초등교육으로 시작해 중등과는 1904년에, 대학과는 제4대 학당장인 미국인 룰루 프라이가 취임 후 1910년에 설치됐다. 1914년에는 유치원과 유치사범과도 생겼다. 이화학당 안에 유치원과 대학과정까지 종합교육과정이 마련돼 교육목적과 교육범위가 전연령대로 확장됐다.

‘보다 진보한 한국인’, ‘한국적인 기독교인’, ‘기독교 가정 형성을 위한 현모양처 양성’을 지향한 이화학당의 목적은 설립자 스크랜턴 부인부터 4대 학당장 프라이에 이르기까지 점진적인 발전과정을 거치며 체계화됐다. 1886년부터 25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유치원에서부터 대학과를 포함한 전인적인 여성교육기관으로 성장했다.

▲ 1931년 명신여자고등보통학교(숙명여대) 금강산 수학여행.

■ 민간·황실주도 ‘현모양처’ 지향 “여자로서 제대로 된 역할 수행이 사회 발전에 도움” = 1908년 춘강 조동식이 설립한 동원여자의숙 교육이념은 민간 사립여학교의 교육방침을 가장 잘 표현한다. 동원여자의숙은 1909년 동덕여자의숙을 병합해 동덕여자의숙으로 새 출발했다. 

“여자교육은 어디까지나 여자를 만드는 교육이요, 그것이 가정을 만들고 국가를 만드는 것이다.(동덕50년사, 1960)”

동원여자의숙 교육이념은 성별분업적 사고체계를 유지하고 있으나 새로운 교육을 통해 여성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한 점에서 체제 순응을 넘어선 변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명신여학교(숙명여대)는 1906년 대한제국 황실로부터 대지와 경비를 보조받아 설립됐다. 초대교장은 우리나라 교육사상 최초로 한국인 교장인 정경부인 이정숙 여사가 취임했다. 명신여학교는 황해도 전라남도 경기도 등 3도와 신천, 은율, 완도 등 6군의 농경지 수익금을 재원으로 11세부터 26세의 여학생 5명을 선발해 문을 열었다.

당시 학교는 황성신문을 통해 “나라 백성되기는 남자나 여자나 마찬가지인데 시운의 시급함에 비추어 여자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1906,5.26)”고 밝혔고, 이정숙 초대교장 또한 “정숙 두 글자를 명심하라. 착실한 가정 살림꾼이 제일이요, 직업 부인이 됨은 반갑지 않다”고 강조했다.

▲ 1930년 명신여자고등보통학교 운동회 한 장면.

■ 차미리사 여사 “조선 여성이여 자립하라” 대중교육 중요성 부각 = 1923년 차미리사 여사는 부인야학강습소 명칭을 근화학원이라고 개명했다. 주학부를 신설, 교육의 중심을 야학에서 주학으로 바꿨다. 부인양학강습소는 차미리사가 1919년 3·1독립정신을 계승하며 종다리(宗橋) 예배당에 설치한 교육기관이다.

차미리사는 1897년 남편과 사별하고 중국유학 이후 1905~1910년까지 한인교육기관인 대동교육회·대동보국회 회원으로 대동신문 발간에 참여하는 등 한일민족계몽운동을 전개한 여성독립운동가다.

또한 1920년 조선여자교육회를 설립, 순회 강연을 통해 민족 실력 양성을 역설하고, 1923년 근화학원을 설립해 민족교육과 무궁화사랑운동을 전개했다. 1925년 보통학교를 졸업한 여학생들을 위한 고등과를 신설하고, 영어과와 음악과를 한층 높여 전문부로 변경, 기존의 직업교육은 6개월 수료과정의 재봉부를 운영했다. 같은 해 근화여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았다. 하지만 차미리사는 이후 1940년 조선총독부의 압력에 의해 덕성여자실업학교 교장직에서 물러났다.

▲ ‘신진여류의 기염’ 난에는 차미리사를 포함, 김활란, 나혜석 등 신여성 열 명의 글이 연재됐다. 차미리사 논설을 통해 여사는 교육을 통해 일천만 여성에게 새 생명을 주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일천만 여자에게 새 생명을 주고자하노라’(동아일보 1921년2월21일자)(출처=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차미리사는 여성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강력한 실천력과 희생정신으로 일생의 고난과 역경을 이겨냈다. 그의 정신은 근화여학교 교훈에 고스란히 담겼다.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살아라. /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

그는 당시 언론에 기고한 글에서 여성교육을 ‘새 생명’의 기회로 표현하고 있다. 1920년대 들어 차미리사는 교육을 통해 일천만 여성에게 새 생명을 주겠다는 웅대한 포부를 밝혔다. 특히 주목한 대상은 문맹의 가정부인이었다. 그가 엘리트교육을 지향하는 것이 아닌 대중교육론에 강조점을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여대 교육의 향방 “특수성 인정하고 지속적으로 고민해야” = 1990년대 여대의 공학전환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1994년 성심여대가 가톨릭대와 통합했고 같은 해 효성여대가 대구가톨릭대로, 1996년 상명여대가 상명대로 전환했다. 1997년에는 부산여대가 신라대로 남녀공학 전환을 시행했다.

서울의 한 여대 총장은 후보시절 공약으로 ‘성역(性域)없는 대학 Genderless'를 내걸기도 했다.

최근 일부 여대는 체계 변화를 꾀하고 있다. 대학구조개혁 일환으로 전국의 모든 대학이 같은 지표로서 줄 서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학의 특수성은 묵살되고, 취업률이 주요한 지표로 떠오른 이상 여자대학의 위치는 더욱 불안해졌다는 분석이 나오는 것은 그런 이유다.

손승영 동덕여대 교수(교양학부)는 “일괄적인 평가 지표를 통해 진행되는 대학구조개혁이 여대의 존립을 위협하는 요인”라고 꼬집었다. 손 교수는  “공학으로의 고민은 남학생을 뽑으면 취업률이 상대적으로 높아지지 않을까 하는 고민 때문일 것”이라며 “하지만 공학으로의 전환도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기존과 다른 기반시설을 갖춰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 또한 신중한 고민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2011년 동덕여대 창학 100주년 학술대회에서 나윤경 연세대 문화학협동과정 부교수는 '경쟁적이지 않지만 경쟁력 있는, 여성주의적 공간으로서의 여자대학' 구성을 제안했다.

그는 “‘돈’이 안된다는 이유로 여성학과를 과감히 폐지할 수 있는 한국의 여자대학과는 달리 미국 동부의 더 시스터즈(The sisters) 대학들은 여성주의 수업, 여성주의 연구기관, 학생 자치회 등을 통해 여자대학으로서의 정체성과 사회적 역할을 다져왔다”면서 “대학의 인재상과 사회적 역할을 기타 종합대학들과는 다르게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여성주의 정체성의 가치를 버리지 않은 더 시스터즈가 현재 사회적 인정을 받으며 자리매김하고 있는 상황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현재 우리 여대에서도 일상생활 속의 책임감과 리더십 양성을 통해 이 사회의 리더와 전문가 배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종식시킬 동력이 되는 여대로서의 정체성은 사그러들고 있다. 남녀공학대학과의 차이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여대의 사회적 필요에 대한 의구심은 여기서 비롯된다. 

손 교수는 “서울의 6개 여대만도 규모가 상당하다. 사회 진출했을 때의 파워도 주효하며 무엇보다 사회지도자계층의 확산 측면에서 여대가 힘을 발휘한다”고 말했다. 그는 “일상생활에서 리더십을 키우는 방식으로 교육하고 있다. 모든 것을 여성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대학이 ‘교육의 장’이 된다. 이는 여대 존립에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고 강조했다.

손 교수는 “여대로서 발전을 꾀하기 위한 고민이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며 “여성혐오적인 시각과 편견에 대해 여대는 저항하고 이를 남녀평등적 시각과 인식으로 이끌고 나가야 할 사회적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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