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5월 18일 오후 미군정청 문교부. 유억겸 문교부장은 창밖에 펼쳐진 미국 성조기를 바라보며 착잡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비서가 펼쳐들고 들어 온 동아일보 기사를 보자 기겁을 하며 놀랐다.

"국립 대학 설립 준비"

국립대학이라면 미군정청 안에서 이미 지난해부터 오천석차장과 자신이 준비해온 것이었다. 이미 모든 계획이 완성되고 적당한 시기에 발표날짜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해괴한 일이란 말인가?

유억겸이 기겁을 한 것은 정보가 새 나갔기 때문이 아니었다.

"국립대학을 만들어? 기가 찰 노릇이군. 국립대학은 나라에서 세우는 것인데 자기들이 어떻게 국립대학을 만들겠다는 것인가? 신익희가 또 일을 저질렀군."

그러나 이런 일이 있은지 두달만인 7월 13일에 유억겸은 오천석차장과 함께 마련한 '국립서울대학 설립계획'을 발표하면서 기자들에게 자기가전에 내뱉은 말을 똑같이 들어야 했다.

"국립대학은 나라에서 세워야 국립대학이 아닙니까? 지금은 독립된 나라도 없는데 무슨 국립대학입니까?"

그런데 이보다 앞서 5월 18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는 다른 신문들과 비교해보면 묘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동아일보가 '국립 대학 설립 준비'라는 제목의 기사를 발표할 때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독립신문 등 다른 언론의 제목은 '국민대학 설립, 우선 야간부만 두고 학생모집'이라는 기사를 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동아일보가 미군정이 시행하는 +국립대학 설립계획을 미리 보도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교정을 잘못 본 것일까? 그러나 내막을 살펴보면 동아일보 식자부의 문선공이 핀셋으로 '국민'을 '국립'으로 잘못 뽑아 놓은 실수는 아닌 것이 분명했다. 한반도 이남은 분명히 미군 점령지대고 그들에 의한 군정이 베풀어지고 있는데 그들이 세우는 대학이 국립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일제시대의 경성제국대학처럼 미국국립대학이라면 모를까?

이와 달리 신익희가 주동이 되어 임정요인들과 함께 세운다는 대학을 +오히려 국립이라고 해석했던 것은 큰 잘못이 없어 보인다. 중국에서 환국한 임시정부는 여전히 망명정부 신세지만 그래도 정부는 정부니까 남들이야 인정하든 말든 우리의 민족 자존심으로는 그것이 국립대학이 아닌가? 동아일보가 '국립대학'으로 발표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이것이 미군정의 심기를 자극하지 않았을 리는 없었다. 국립대학은미군사령부가 이미 해방직후부터 계획하고 곧 발표단계에 있었는데 신익희를 비롯한 '임시정부 패거리들'이 불쑥 튀어나와 자기들이 먼저 국립대학을 세운다고 나선 것이 아닌가?

워싱턴 NARA의 [신익희 파일]을 뒤져보면 당시의 상황이 보다 분명해진다.

신익희는 환국 후 미군정 당국에 의해 공산당 못지않게 없애고 싶은 인물로 정보사찰 대상이었다. 미군 정보기관에 끌려다니며 곤욕을 치르고 지금까지 [신익희 파일]로 이름을 남기게 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 그가 국민대 설립자였으니 이 대학이 설립단계에서부터 겪어야 할수모와 고난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재정확보가 더욱 어려워지고 이것이 또 내부 갈등을 빚었다.

그 결과 국민대는 두 갈래로 갈라져 창성동의 국민대와 마포에 간판을 건 또 하나의 국민대가 생기게 되었다. 물론 결과적으로 보자면 그렇게 두 개로 갈라진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그 같은 세포분열 현상이 안 일어났다면 지금의 경남대학도 없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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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학의 설립 구상은 신익희가 임시정부 요인 제 2진과 함께 +개인자격으로 환국하던 45년 12월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임시정부 요인들은 환국과 동시에 인재양성과 민족교육을 담당할 +대학 설립의 필요성을 논의하게 되는데, 이때 신익희는 윤교중, 옥선진, 조남식 등 뜻을 같이하는 인사들과 함께 대학설립기성회를 세우는 일에 착수했다.

46년 3월 발족한 설립기성회는 상해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민족대학 설립 의지를 표명해 김구와 김규식, 조소앙 등 임정의 주 요인이 고문 또는 명예회장에 추대되고, 백낙준, 이태규, 조윤제 등 교육계 인사 40여명을 이사진에 참여시킴으로써 대표성을 가진 대학 진용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어 5월 18일에는 설립기성회 발족 사실을 언론에 공표하고 설립 자금 모금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 시기는 미군정이 이미 당시 정치 외교 국방에 이어 교육에 대한통제까지도 염두에 두고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을 구체화한 시기로 임정 +요인이 주축이 된 대학 설립에 고운 시각을 보일 리가 없었다.

국민의 지지를 받는 민족주의 집단으로서 임시정부는 미국의 점령의도와 국익에 어긋나기 때문이었다. 이는 해방 후 미군정 교육정책의 방향이 자생적 교육자치운동이나 좌익계 또는 민족 성향을 가진 교육 활동을 배제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국립 서울대학교가 수많은 저항에도 불구하고 신학기가 시작되는 9월 1일 +개교할 때 같은 날 개교한 국민대학이 정규 대학이 아닌 [국민대학관]의 이름으로 그것도 그 해 12월에 가서야 인가를 받은 것은 이 같은 정치 역학관계와 무관하지 않았던 것이다.

국대안에 반대하여 국민대로 전학하거나 자리를 옮긴 학생과 교수가 많았던 것도 이같은 상황을 반영한 결과였다. 이때 입학한 국민대 1회 졸업생 남덕우, 김성기 등은 당시 서울대학교를 다니다가 전학한 +경우였으며, 경성상업전문학교에 있었던 전석담의 경우 국대안 반대 운동을 전개하다가 국민대로 와서 조선경제사를 강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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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신흥사학이 초창기에 교사 확보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듯이 국민대학도 교사가 없어 고초를 겪었다. 특히 이 학교는 기성회 설립 당시5만평의 토지 기부를 약속했던 박기홍의 미망인 조희재 여사와 이사진으로 참여한 장형 등이 손을 때면서 재단을 구성할만한 자산이 거의 없었다.

때문에 1946년 9월 1일 [국민대학관]의 이름으로 개교하고도 변변한 +교사가 없어 종로구 내수동에 위치한 보인상업학교 별관 2층을 빌어 야간부 학생을 받았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증언이 엇갈리고 있다. 학교 관계자와 국민학원 50년사에는 이때부터 강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서술되고 있지만 이 대학 1회 졸업생인 김진옥씨 등에 따르면 정식 강의가 이루어진 것은 인가가 난 12월 18일부터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교사 확보에 어려움을 겪던 국민대학관은 47년 10월 최범술을 이사장으로 영입하면서 그의 알선으로 관제처 수속을 거쳐 서울 중구 남산동에 위치한동본원사(남산초등학교 뒤 KBS 옆)를 교사로 쓰기 시작했다.

최범술은 당시 조선불교 중앙총무원 총무부장으로 후일 제헌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는데 해인사 사찰 재산을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혀 신익희 +후임의 새 이사장에 선출된 사람.

그러나 이마저도 사용한지 3개월여만에 미군정에 의해 강제 폐쇄되는 아픔을 겪게된다. 교사로 쓰던 동본원사 건물이 적산으로 분류돼 미군정에 귀속되어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급기야 미군정은 48년 1월 5일 UN 위원단이 도착할 때 그들에게 불미스런 +모습을 보일 수 없다는 등의 이유로 국민대가 사용하던 교육 비품을 +시청으로 강제 운반했다. 이 과정에서 미군과 중부경찰서 소속 경관들은 +이를 말리던 학생과 교수들을 총대와 방망이로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70여명의 학생과 3명의 교수를 연행해 이 중 3명을 재판에 회부했다.

그러나 미군정의 이같은 조치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매일 50여명씩학교에 나오는 이른바 '등교 투쟁'을 벌였다.

그런데 미군정의 처사는 당시 동아일보와 독립신보 등의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사회문제로 확대돼 분노하는 여론이 들끓게 되었다. 당시 미국 언론인 뉴옥타임즈에도 이같은 갈등 양상이 소개되었다. 그리고 2월에는 급기야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정식안건으로 상정돼 '국민대학의 동본원사 +재사용과 강제 명도한 서울시와 학생들을 난타 고문한 책임 규명'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교사 사용 문제로 야기된 이 사건은 여론에 몰린 미군정의 주선으로 국민대가 48년 2월 10일 서울시 종로구 창성동 117번지에 위치한 당시 +체신교원양성소 건물(현 정부합동청사 자리)을 임대, 이전함으로써 일단 수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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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학관은 48년 8월 10일 재단법인 국민대학(이사장 최범술, 학장 +신익희)으로 정식 인가됨으로써 비로소 4년제 정규대학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최범술 이사장이 공언한 자산 출연과 교사 수리 약속이 지켜지지 않고 교사의 공사가 중단되는가 하면 신익희를 해임하고 자금 출자자인 정윤환을 새 학장에 세우면서 학생들로부터 불신을 받아 급기야는 재단 축출 결의와 결별로 이어졌다.

이때부터 상당기간 국민대학은 재단과 무관하게 학생과 교직원에 의해 운영되었다.

학생들은 건축위원회를 만들어 등록금 중에서 교사신축자금을 받아 적립한 끝에 49년 9월 5일 연건평 2백80평의 목조 2층 건물을 완공했다.

당시 학생건축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김진옥씨(1회 졸업)의 증언.

"교사를 세우려는 노력은 대단했어요. 당시에는 부실한 재단에 기대를 걸 +수 없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학생과 교직원들이 하나가 돼 학교를 새로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요" 이렇게 지어진 창성동 교사는 쌍용의 김성곤이 이사장을 맡으면서 59년 북악산 밑에 위치한 현 위치로 이전하기 전까지 20여년간 요람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학생들에 의해 불신임된 최범술 재단은 독자 노선을 걷기 시작해 기존 학교와 분리해 마포에 [국민대학관] 간판을 걸고 학생을 받았다. +하나의 뿌리에서 출발한 두 대학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마포의 국민대학은 6·25 동란 직후인 1952년 3월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안리 10번지 에 위치한 해인사 경내로 교사를 이전하고, 4월 23일에는 재단법인 국민대학을 해인대학으로 개편, 인가 받아 해인대학으로 새롭게 출범했다.

그러나 불교재단의 실권자인 최범술 이사장이 취임 당시 재단에 희사하기로 한 해인사의 일부 재산은 끝내 산문회의 추인을 받지 못해 +학교 재산으로 전환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해인대학은 여러 차례 재단이 바뀌고 교사와 교명이 바뀌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어야했다.

해인대학은 1961년 2월 22일 다시 교명을 마산대학으로 바꾸었으며 이 해 +11월 13일에는 대학 정비령에 의해 학생모집 중지 통보를 받아 마산 실업초급대학으로 격하되기에 이르렀다. 그 후 학교법인 해인학원은 대학을 정상궤도에 올려놓지 못한체 물러나고 +68년 1월 삼양학원이 들어서면서 비로소 재단을 둘러싼 오랜 분규가 마무리되었다.

마산대학은 10년째가 되는 71년 12월 31일 경남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해 새출발했으며 다시 10년이 흐른 1981년 7월 28일 종합대학으로 승격, 인가됨으로써 경남대학교란 교명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 【취재지원 = 이일형 차장】

● 미군정 정보 문서 [신익희 파일] : 임시정부 주권 회복 정신 담아

해방의 소식을 중국 중경에서 접해야 했던 임시정부는 환국을 준비하며 '당면정책 14개조'를 발표했다. 이는 환국 이후 임시정부의 책무와 역할을 규정하는 것으로 질서 유지와 대외관계를 담당하면서 각 계층의 지도자를 소집해 과도정권을 창출하는 것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임시정부의 이같은 구상은 한반도에 미소가 진주해 분할 점령하면서 상황이 돌변했다. 미군정은 한반도 남쪽을 점령한 유일 +정부였다. 그런 미국이 임시정부를 국가 공식기구나 합법 단체로 인정할 리 없었다. 임정 요인들이 곧바로 귀국하지 못하다가 개인자격으로 환국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임시정부에서 내무부장으로 활약하던 신익희는 환국과 더불어 임시정부의 하부조직으로 정치공작대와 행정연구위원회를 조직했다. 정치공작대와 행정연구위원회는 이미 환국 이전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결정된 사안으로이후 신익희의 정치적 기반을 이루었던 조직. 이런 가운데 12월 말 미소의 분할 점령을 담은 신탁통치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신익희는 반탁에 앞장서며 미군정에 정면 대항했다.

그는 12월 31일 임시정부 명의로 발표한 [국자 1, 2호]를 통해 "미군정이 장악하고 있던 전국의 행정권과 경찰권을 임시정부가 접수한다"는 것과 "국민은 우리 정부 지도 하에 제반사업을 부흥하기를 요망한다"는 내용의 권리 선언을 함으로써 임시정부가 국민의 주권을 관장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것이 소위 '신익희 쿠데타'다. 이 일은 사실 우리 민족에게는 자주 독립의 강렬한 의지를 내보인 것이었지만 미군정청의 입장에서는 이를 임시정부의 '반탁 정변'으로 간주하였다.

이같은 사실은 후일 주한미군정의 정보 보고서 중 일명 [G-2 Peoriod +Report]가 공개됨으로써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이 일로 신익희는 +미군정에 연행되어 고초를 겪어야 했으며 이후 미군정과는 대립적인 위치에서 정치활동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신익희의 주권 회복 활동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46년 8월 29일로 예정된 제 2차 거사 계획이 대표적인 것이었다.

이날의 계획은 8월 29일을 맞아 전국적인 시위를 벌이고 미군정의 건물을 +점거, 미군정에게 입법권과 행정권을 임시정부의 비상국민회의에 이양할 +것을 촉구한다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남북 군정의 조속 철퇴'를 요구하면서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김구, 내각수반을 김규식으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는 선전 전단을 살포하려는 것 등이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은 당시 미군정 CIC에서도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8월 21일 한국민주당의 장덕수가 미군 CIC 본부에 밀고함으로써 발각되었기 때문. 지금은 워싱턴 NARA에 소위 '신익희 파일'로 관리되는 문서 대부분은 바로 이 당시 거사 계획을 미리 안 미군정이 신익희의 집과 사무실에서 압수 수색해 노획한 문서였다.

미군정으로부터 '제2의 쿠데타'로 명명된 이 계획의 배후에는 임시정부의 +정치공작대와 행정연구위원회가 있었으며 양 조직의 수장은 신익희였다. 그리고 이들 단체의 주요 인사들이 그대로 국민대학설립기성회의 상임이사가 되고, 대학 설립 후에는 교직원으로 대학 운영에 참여함으로써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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