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규식(본지 논설위원/ 중앙대 교수)

▲ 장규식 본지 논설위원(중앙대 교수)

‘창조경제’, ‘창의성 교육’ 한국사회의 발전 방안을 거론하며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말들이다. 우리 사회의 선진화 전략으로 ‘모방에서 창조로 전환하기 위한 과학기술 혁신’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 1990년대 중반이니, 우리는 무려 20년 동안 ‘창조’란 단어를 쇠귀에 경 읽듯이 그저 읊조리고만 있는 셈이다. 무엇이 이 ‘창조’라는 키워드를 식상하고 공허한 말로 만들어버린 것일까. 창조의 ‘과정’을 무시한 채 눈앞의 단기적 성과에만 매달리는 사회 풍조를 먼저 꼽지 않을 수 없다. 창조의 열매가 맺어지기 위해서는 다양한 시행착오와 다소 엉뚱해 보이기까지 하는 발상의 전환을 담아낼 여백의 공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그런 여백을 찾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교육 분야만 놓고 봐도 모든 것이 경쟁지상주의에 기초한 상대 평가로 학생들의 성적을 재단한다. 수시 논술, 입학사정관제, 정시 등으로 복잡하게 나뉘어 웬만한 사람들은 들어도 이해 못할 입시제도는 촘촘하게 청소년들의 일상을 얽어맨다. 중학교 때부터 스펙 관리를 해야 하고, 그러지 않고 고등학교 2학년 때쯤 대학 진학에 신경 쓰려 하면 “이제 네가 갈 수 있는 대학은 최고가 5두품(?) 대학이야” 하는 냉정한 골품제의 판결을 받아야 한다. 청소년기 없는 청소년들을 양산하는 슬픈 우리 교육의 자화상이다. 한국 같은 온정주의 문화 속에서 입학사정관 제도가 공정성을 확보하기는 쉽지 않다. 논술 또한 해당 대학의 규격화된 채점 기준에 맞춰 써야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다. 자기 생각이 들어갈 여지가 원천 봉쇄 되는 것이다.

필자는 논술 세대의 학생들을 받으면서부터 서평 이외의 보고서 과제를 내지 않는다. 인터넷 상에서 돈 주고 리포트를 사와서 편집하거나, 선생 취향에 대한 정보를 찾아내 거기에 맞추려 하는 학생들을 보면서였다. ‘임금님은 벌거숭이’라고 외친 천진난만한 아이의 눈과 참신한 발상을 가지고, 투박하더라도 원석을 담은 자기 글을 쓰라고 그렇게 권유해도 그동안의 관성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이제 곧 전국의 모든 중학생을 대상으로 자유학기제가 시행된다고 한다. 학생 스스로가 생각하고 판단할 여백의 기간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고무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학생들의 일상을 촘촘히 얽매는 현행 입시제도가 존속하는 한 그 효과는 미미할 수밖에 없다. 미군정기에 한국 교육제도의 기초를 놓은 오천석은 훗날 자신이 추구했던 민주주의 교육은 식민지 때부터 강고하게 이어져 온 입시 교육에 밀려 결국 실패했다고 고백했다. 그 정도로 입시교육은 당장 어찌하지 못할 한국 교육의 커다란 벽이다. 우리 풍토에 맞지 않는 외국 제도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결과, 더 지독한 변종 바이러스들이 만들어져 한국교육과 청소년들의 심성을 좀먹었다. 자유학기제가 그런 전철을 밟지 않고 창조의 여백을 넓히는 촉매제가 되길 바랄 뿐이다. 

모방에서 창조로의 패러다임의 전환은 교육뿐만이 아니라 한국사회 전반에 걸쳐 시급한 과제다. 지난 20년 동안 우리는 창조의 여백을 만들어 씨 뿌리고 김매는 노력 없이, 모방의 관성 위에 구호로만 창조를 외쳤다. 그 결과 사회의 성장 동력은 점차 소진되고, 기술 혁신의 벽에 부딪친 대기업들은 힘으로 불공정한 하청관계와 불완전한 고용관계를 양산하며 마른 행주 쥐어짜듯 해서 몸집을 불리고 심지어 골목상권까지 침범하는 약탈 행위를 주저하지 않고 있다. 당장은 몰라도 구매력의 감소로 결국에는 모두가 공멸할 어리석은 짓이다. 지금부터라도 까치밥의 미담에서 상생의 지혜와 여유를 배우고, 창조의 씨를 뿌릴 여백을 만들어 나가자. 그것만이 우리 모두가 살길이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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