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의창(본지 논설위원/서울대 교수)

대학의 체육교육이 어려운 처지다. 기업이 인력 감축으로 예산 절감을 하듯, 대학도 강좌 축소로 예산을 아끼려 한다. 당장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된 강좌들은 아예 없앤다. 교양체육이 바로 이런 강좌 중 대표적이다. 대부분의 대학에서 수영, 테니스 등 실기 강좌들을 없애거나 대폭 감소시키고 있다. 교양체육은 ‘운동과 건강’, ‘스포츠와 사회’ 등 한꺼번에 100명 이상의 인원이 수강할 수 있는 이론과목 위주로 남겨지는 추세다.
 
대학이 제시하는 교양체육의 폐지나 축소 이유는 간단하다. 생활체육은 동네의 스포츠센터나 피트니스센터에서 훨씬 더 제대로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먹고 살기가 어렵고 운동 배우기는 쉽지 않던 1990년대 이전에나 대학에서 교양으로서 체육을 가르칠 이유가 있었다. 그 시절만 하더라도 학생들은 테니스나  수영도 대학에서 처음 접해보는 운동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대학보다는 지역사회에서 훨씬 더 다양한 스포츠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대학 내 체육의 ‘교양적 가치’가 상실되었다는 말이다.

대학은 지금 더욱 ‘핵심교양’이니 ‘인문교양’이니 하는 개념으로, 생각하는 능력과 말하는 능력 위주의 교양교육을 펼치고 있다. 서울대 기초교양교육 프로그램은 ‘학문의 세계’, ‘학문의 기초’ 그리고 ‘선택교양’으로 범주화 되어있다. 주지교과목 위주의 기초교양관이 여전히 팽배해있음을 알 수 있는 구분법이다. 체육과 음악, 미술은 실기를 지도하는 기능강좌로서 ‘기타’교과의 지위로 밀려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일상적 삶과 일은 어떠한가. 우리 삶과 일에서 바탕이 되는 기초교양은 협동, 배려, 용기, 리더십, 희생, 성실 등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오래전 간파했지만, 책읽기와 글쓰기보다는 체육을 통해서 더욱 잘 배울 수 있는 것들이다. 일을 위해서 말 잘하고 글 잘쓰는 것만이 아니라, 놀이를 위해서 몸 잘 쓰는 것도 성인이 갖추어야 하는 교양이다. 인간을 호모 루덴스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체육은 고대 그리스와 중국에서부터 최고의 교육활동이었다. 오늘날 체육관으로 불리는 김나지움이 체육활동이 주가 되는 그리스의 고등교육기관이었던 것을 상기해보라.

체육(스포츠와 건강운동)은 현대인이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기초교양’이다. 방송과 신문을 보라. 스포츠로 하루가 시작되고 마감된다. 주변을 보라. 온통 건강을 위한 운동장소와 프로그램이다. 우린 개인 삶의 행복과 불행에 체육이 절대적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체육은 삶을 위한 교양에 가장 필수적이다. 그런데, 집 앞에서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체육 시설에서 배우는 것으로 충족될 수 없는 무언가가 대학 교양체육에 있는 것인가. 사람들이 체육에 대해 지닌 기초교양을 ‘운동소양’(運動素養, sport literacy)이라고 부른다. 대학생에게 이 운동소양을 갖춰주는 것이 대학체육의 핵심 역할이다. 이 시기는 초중고에서 경험한 학교수업 중심의 집단적 체육체험이 개인적 생활스포츠 중심으로 전환되는 중요 시점이다. 평생을 위한 운동소양이 제대로 쌓이기 위해서는 올바른 배움과 행복한 체험이 고등교육적 차원에서 절대적으로 요청된다. 대학에서의 교양체육은 바로 그런 의미 있는 체험을 하는 장소다.

대학에서 평생토록 운동을 즐길 수 있도록 운동을 할 수 있는 기능적 소양(能素養), 운동을 다양하게 아는 지성적 소양(智素養), 그리고 운동을 참으로 좋아하는 정서적 소양(心素養)을 갖추는 것이 꼭 필요하다. 운동을 향유하는 다양한 소질을 길러 각자 성인으로서의 자신과 타인의 삶을 보다 행복한 것으로 이끌어 올릴 수 있게 된다. 50세 중반에 퇴직하는 100세 인생을 어떻게 신체적, 정서적으로 건강하게 살아낼 수 있을 것인가. 스포츠 리터러시가 답이다. 대학에서 행복한 인생을 위한 기초교양으로서 반드시 체육을 제대로 가르쳐야만 하는 이유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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