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학신문 송보배 기자] 영화 ‘동주’와 더불어 윤동주 시인의 고종사촌이자 평생의 동료인 독립운동가 송몽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송몽규는 윤동주 시인에 3개월 앞선 1917년 9월 28일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내성적인 시인과 달리 송몽규는 매우 활발하고 적극적인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1935년 4월 송몽규는 19세의 나이에 중국으로 건너가 낙양군관학교에 입학했다. 백범 김구의 예하에 있던 군관 양성학교였다. 영화에서는 송몽규가 이중첩자로 활동한 이웅을 암살한 것으로 그려졌으나, <윤동주평전>에 따르면 이웅을 암살한 것은 은진중학교 출신의 현철진과 이익성이다. 송몽규는 중국으로 건너간 지 1년 후인 1936년 4월 중국 제남에서 체포된다. 그해 9월 거주제한을 조건으로 풀려난 송몽규는 가슴이 자꾸 구부러든다며, 가슴을 펴기 위해 베개도 베지 않고 잠을 자곤 했다고 한다.

영화와 같이 송몽규는 뛰어난 수재인데다 필력도 상당했다. 1935년 1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꽁트가 당선됐다. 1942년에는 일본 최고 명문인 교토제국대학에 입학하기도 한다. <윤동주평전>에는 송몽규가 매사 한 발 앞서는 것을 느낀 윤동주 시인이 “대기는 만성이다”며 벼르곤 했다는 문익환 목사의 증언이 등장할 정도로, 시인에게 매사 자극을 주는 인물이었다.

1943년 7월 10일 송몽규는 이른바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의 중심인물로 일본 특고 형사에게 체포된다. 이어 14일 윤동주도 체포된다. 죄목은 치안유지법 위반이었다. 일본경찰은 송몽규가 윤동주, 고희욱 등과 수차례 독립의식을 고양하는 발언을 하고 민족의식을 유발한 것을 문제 삼았다. 중국 낙양군관학교에 입학한 전력으로 인해 일본경찰은 송몽규를 요시찰인물로 감시하고 있었고, 그 마수에 걸려든 셈이었다. 결국 송몽규와 윤동주는 각각 징역 2년형을 선도 받고 후쿠오카형무소에 수감된다.

1945년 2월 16일 독립을 끝내 보지 못하고 윤동주가 옥중에서 눈을 감았다. 윤동주의 시신을 수습하러 후쿠오카형무소를 방문한 윤영석과 윤영춘에게 송몽규는 “이름 모를 주사를 강제로 맞고 있다”고 증언한다. 그해 3월 6일 고향 북간도에 윤동주가 묻혔다. 다음날인 7일에는 송몽규가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사망한다. 차마 눈도 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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