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욱(본지 논설위원/ 고려사이버대 교수)

요즘 대학의 졸업식은 20여년전과는 많이 다르다. 졸업식은 대학이라는 과정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시작이며, 성공적인 대학과정의 마감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현재의 졸업식은 소수의 학생들만이 참여하는 형식적인 절차가 돼버렸다. 취업을 못한 학생들은 졸업을 기피하고, 취업 못한 졸업생의 졸업식은 취업준비로 남들의 잔치가 됐다. 졸업은 대학이라는 모든 것이 유예되는 장소에서 사회라는 냉정한 장소로의 이동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에서 충분히 준비해 자신있게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졸업생은 학자금대출 부담과 자신의 경제력 부족으로 사회진출이 즐겁지 않다.

변화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어릴 때부터 부동산 임대업자가 꿈이 돼버린 사회, 노동의 가치는 사라지고 효율성으로 무장한 상업주의만 만연하는 사회, 미래를 위한 투자가 아닌 당장의 결과가 중요해진 교육의 변질, 사회적 격차가 구조적으로 해소될 수 없는 경제계급사회 등 사회적 문제로 대학사회의 변화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현재의 대학은 어떤 모습일까. 인구통계적으로 학령기 인구 감소는 대한민국 대학의 무한 경쟁을 예고한다. 학생이 선택하지 않는 대학은 도태될 수 밖에 없어 교육이념과 학문적 가치만를 추구하기에는 불안하다. 대학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대학은 수요자의 눈치를 볼 밖에 없어 소비자만족을 최우선하게 되는 기업구조와 유사하게 됐다.

딜레탕티즘은 예술이나 학문을 치열한 직업의식 없이 취미로 즐기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프래그머티즘은 당장 필요한 실용성을 최우선하는 것이다. 대학은 딜레탕티즘을 위한 장이여서도 안되고, 프래그머티즘만이 최우선되는 곳이여서도 안된다.

대학은 절대적 수요감소로 새로운 시장을 찾거나 다른 대학이 가지지 못한 차별적 경쟁력을 갖추어야만 하게 됐다. 평생교육시장이 새로운 시장이 된 것이다. 학령기 학생이 아닌 청장년층과 노년층이 교육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러나 평생교육시장은 대학시장과는 전혀 다르다. 딜레탕티즘과 프래그머티즘으로 양분돼 서로가 섞이기 힘든 굳건한 벽을 가지고 있는 시장이다. 학위나 학점에 대한 필요가 없는 사람들에게 공부는 자신의 지적호기심이나 취미로서의 학습을 만족시켜주는 것이 중요하다. 반면 학위가 필요한 사람이나 직업적인 관심이 주된 사람은 학위과정과 자격증과정만이 중요하다. 이 두 시장은 모두 기존 대학의 학부나 학과체제, 교육과정, 대학원중심의 연구체제와는 결코 맞지 않는 새로운 도전이다.

대학에서의 인문학관련 학과의 쇠퇴와 문화센터나 기업경영자들의 인문학강좌에 대한 열광의 양면을 보며 대학의 가치와 본질이 퇴색되는 것이 아닌가 답답해진다. 뿌리가 깊지 않은 나무는 비바람에 약하다. 대학은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곳이어야 한다. 멋있는 가지와 풍성한 잎이 있어도 그 뿌리가 깊지 않으면 오래 가지 못한다.

대학은 고등교육기관으로서 현재의 사회와 시장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딜레탕티즘이나 프래그머티즘을 대학의 교육이념으로 할 수는 없다. 교육정책도 마찬가지다.

최근 시작된 인공지능의 열풍은 며칠만에 수많은 정책을 쏟아내게 만들었고, 주식시장에서는 관련 주가가 요동치며, 심지어는 학부모들의 생각까지 바꾸고 있다. 마치 세상이 인공지능의 사회로 당장 변할 것처럼 이야기한다. 인공지능은 하루 아침에 기술이 쌓이고, 이해가 되는 딜레탕티즘의 대상도, 자신의 재능과 관심에 상관없이 누구나 하면 성공할 수 있는 프래그머티즘의 대상도 아니다. 기초과학부터 충실히 다져지고, 다양한 데이터의 자유로운 활용이 전제되며, 틀에 박히지 않은 사고를 가지고 있어야 가능한 분야이다. 그리고, 대학에서 관련 연구와 교육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우수한 인재들이 모여야 된다. 너무 빠른 결과를 요구하면 결국 깊이 없는 딜레탕티즘이나 근시적인 프래그머티즘으로 전락해 글로벌경쟁에서 뒤처질 수 밖에 없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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