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 교육 50년의 성찰(省察)과 새로운 천년을 희원(希願)하며 … (1)프롤로그 : 해방 전야 분단의 38선, 오욕과 갈등의 시간.

일제를 거쳐 해방과 분단, 군사 독재 등 갖은 오욕으로 점철된 지난 +1백여년의 한국 현대사 가운데 근대적 의미의 교육, 특히 역사의 중심에 섰던 대학의 모습을 돌아보는 작업은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를 맞는후학들에게도 결코 소홀히 취급될 수 없는 일이다.

대학의 역사는 대학인들만의 것이 아니며 시대에 따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영향을 미치며 성장해왔기 때문이다.

본지는 새로운 천년을 시작하는 2000년을 맞아 대학 과거사를 정리하는 특별기획 김우종의 대학 비사, '저 분노의 땅에 상아탑을 세워라'를 연재 보도한다.

본 기획은 일제를 거쳐 해방과 함께 찾아온 분단 조국의 현실을 역사 +인식의 기초로, 획일화된 군사정권과 5·6공화국, 문민과 국민의 정부로 대변되는 최근에 이르기까지 시대별로 각기 모습을 달리해온 대학 교육 +상황과 현실, 사건의 기록들을 재조명하는 한편 사건 이면에서 신음하던 +수많은 지식인의 고뇌와 갈등을 되새기는데 초점을 두고자 한다.

특히 평생 교육계에 몸담아 온 김우종 주필의 체험담을 바탕으로 그간 대학 주변에서만 맴돌던 각종 의혹과 소문의 근원을 찾아 숨겨진 비화들을하나 하나 발굴함으로써 근 현대 대학사 연구의 밑거름이 되고자 한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제보를 기대한다. <편집자>

"학생 제군들. 저 미국을 보시오. 개척 시대의 미국을 잘 알지요? 개척 +시대에 그들은 어떻게 해서 오늘의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는지 …"

1960년대 후반의 어느 화창한 봄날.

서울의 한 신흥 대학 총장은 조회 시간에 나와 전체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이렇게 개척시대의 미국 이야기를 서두로 훈화를 시작했다.

그 무렵 이 대학에서는 한 달에 한번쯤 학생들과 교직원 전체가 본관 앞에 모여 조회를 열곤 했다. 요즘 같으면 유명가수라도 불러 미리부터 요란을 떨면 모를까, 출석 채크도 하지 않는 조회에 나와 총장님의 훈화 같은 것을 들어 줄 만큼 순박한 학생은 없는 세상이 됐지만, 당시만 해도 우선 ROTC 학생들부터 불러모아 가로 세로 꼿꼿하게 정렬시켜 기본 '청중' 자리를 메우고, 나머지를 교직원과 학생들로 채웠다. 특히 그 날은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는 첫 조회시간이었으므로 신입생들은 거의 전원이 참석해야 했다.

이날 이 대학 총장은 왜 미국의 개척시대 얘기를 했을까 ?

미국의 개척시대라면 영화에서나 보이듯 미화된 환상과는 달리 인디언을 거의 멸종시키고 극소수만을 보호3구역으로 몰아 넣고 살려 둔 잔혹한 대학살을 연상케 된다. 생태계 보존 차원에서 멸종 위기에 처한 포유동물 몇마리를 살려둔 셈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흑인 노예 몇백만명을 쇠사슬에 묶어 아프리카에서 잡아다 채찍질로 다스리며 넓은 땅을 개척해 +나갔다. 같은 백인종계라도 인간 백정 총잡이가 곧 법이었던 시대였음은 역사의 이면을 차분히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왜 하필 고등교육을 받는 학생들에게 그런 미국의 개척시대를 +상기시키려 했을까? 아마도 이 대학은 해방직후에 세워진 일부 대학들이 +종합대학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빚어졌던 비정상적인 일들에 대한 비난 +여론을 개척시대 미국의 상황에 대입시키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미국이 그렇듯이 우리나라 대학의 떳떳하지 못한 과거사도 빛나는 미래를 +위한 불가피한 수단이었다고. 물론 미국의 무수한 반인륜적 행위와 우리 대학 발전사 이면에 가려져 있던 그것은 아무리 공통점이 있어도 무법 수준은 별개의 것이지만.

그런데 문제는 법이 무시된 대학 발전의 역사가 비단 이 대학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대다수 대학의 역사이며, 특히 고등교육 전반에 걸쳐 나타났다는데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과거를 비난하기 전에 왜 이 나라 고등교육이 처음부터 그런 모습으로 성장했어야 했는지, 그 근원부터 따져 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다소 진부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우리나라에 해방이 +어떻게 찾아왔으며 해방 조국에 대학이 세워질 때 그것을 누가 허가하고 감독하고 명령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본다면 원죄가 어디에 있었는지 짐작하는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1945년 8월 10일 심야.

미국 워싱턴 팬타곤의 국방차관 회의실에는 국무성, 육군성, 해군성의 최고 간부들이 갑자기 소집된 합동위원회(SWNCC)의 철야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이날 밤 간부들간에 오간 회의의 주요 내용을 몇가지 사료를 토대로 옮겨보면 이렇다.

"어제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전해왔습니다. 그런데 8일에 대일 선전포고를 한 소련은 한반도의 북단 상리(上里)를 기습하고 나진을 거쳐 빠른 속도로 남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세라면 한반도 전체를 곧 소련군이 점령하게 됩니다. 이를 저지하려면 우리도 당장 한반도에 상륙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군은아직 오끼나와에 머물러 있어 불가능합니다."

이날 심야회의는 자정을 넘겨 11일까지 계속됐으며 논의 끝에 나온 최종안이 소련과의 협상안이었다. 서로 바쁘게 쳐들어갈 것 없이 한반도를 미리 둘로 분할해서 점령하기로 약속하자는 안이었다.

"당신들 두 사람은 한반도를 둘로 나누시오. 30분 안에 하시오. 시간이 없소"

이날 회의 도중 명령을 받은 두 사람은 육군성의 딘 러스크(Dean Rusk) 대령과 찰스 본스틸(Charles H. Bonestell) 대령이었다. 그들은 곧 +옆방으로 달려가 한반도 지도를 찾았다. 그런데 그 근처에는 한반도 지도가 없었다. 거침없이 빠른 속도로 남진하는 소련을 저지하려면 한시간이라도 빨리 협상안을 내놓아야 하는데 ….

"이게 뭐야. '내셔널 지오그래픽'이군. 여기에 있을지도 모르지"

다급해진 두 사람은 황색 표지에 세계의 신비한 자연 환경과 풍속 등이 소개되고 있는 여러권의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허겁지겁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떤 한반도 지도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들은 곧 그 지도 위쪽에 위치한 38。선에 직선을 그었다. 구불구불 그었어도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그들은 분할선이 누구 집 안방을 자르고 지나든 말든 그리 신경 쓸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지도를 찾으며 우왕좌왕 시간을 다 보내 정작 38선을 긋는데는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어쨌든 한반도 가운데보다 북쪽으로 올려 그은 것은분명했다. 이미 한반도를 다 집어삼킨 소련이 38선 분할점령안을 받아들이기에는 무리한 요구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딘 러스크는 훗날 미 국무장관에 올랐다가 퇴임 후 회고록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어놓고 있다.

"38선은 실질적인 합의에 도달할 수 있기에는 너무 북쪽에 위치해 있다. 소련이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뜻밖에도 소련의 스탈린은 38선 분할점령안에 한마디로 동의했다. +그래서 그는 소련이 군말 없이 찬성해 주었기 때문에 '약간은 놀랐다'는 것이다.

이 말은 소련이 반대할 걸 예상해 적당히 비싼 값을 불렀다가 나중에 +양보해 타협할 생각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양보하려 했을까?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소련이 더 남쪽을 요구했다면 독일의 +베를린을 쪼개듯 서울도 남대문에서 서대문으로 지나도록 선을 긋고 담벼락을 쌓게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는 총독부의 정무총감 엔도(遠藤 柳作)가 8월 15일 아침까지도 한반도 분할 사실만 알았을 뿐 그것이 38선이라는 것은 몰랐다는 고백에서도 나타난다. 그래서 여운형에게 한강이 분할선이 될 것이라며 항복에 따르는 정치적 흥정을 했다는 것이다.

직선은 안방까지 둘로 쪼개고 지나가는데 비해 한강은 한반도의 중간이며 강물이 자연적인 분할선이자 방어선이 되는 것이니까 ….

이처럼 해방 전야 이해관계에 있던 이들은 우리민족의 운명과는 상관없이 한반도 땅을 둘로 나눠먹을 수 있는 빵이나 떡쯤으로 여겼던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 대학의 기원과 해방 이전의 고등교육기관

근대 개념의 대학 역사는 중세 유럽에서 태동했다. '대학(university)'이란 이름이 사용된 것은 15세기경이지만 12세기 중세 유럽에서는 근대적 의미의 대학이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돼 의학의 살레르노, 법학의 볼로냐, 신학의 파리 대학이 생겨났으며, 교황이나 황제등 위로부터 형성된 대학으로는 나폴리, 툴루즈, 프라하 대학 등이 등장했다.

이 당시 대학 구성원들의 모임체를 통칭하던 우니베르시타트(universitas)와 고등교육의 시설 또는 장소적 의미로 사용되던 스투디움(studium)이 합쳐져 15세기에는 현재 사용되는 대학(university)이란 용어가 단일 개념으로 통용되었다.

시대에 따라 교육 내용에 다소 차이는 있지만 우리도 일찍이 고구려 태학, 신라 화랑도, 통일신라의 국학에 이어 고려시대 국자감에 이르기까지 이미 중세 이전부터 국가 또는 민간 차원에서 인재를 양성하는 +고등교육기관이 존재해왔다.

1398년 조선 태조에 의해 설립된 [성균관]은 중세 유럽의 대학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명실상부한 엘리트 고등교육기관으로 조선시대 새로운 통치 세력으로 정치사와 사상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성균관대는 전신인 [성균관]의 전통을 이어받아 1백여년 안팎의 역사를 갖고 있는 다른 대학과는 달리 지난 1998년 건학 6백주년 기념식을 대대적으로 열기도 했다.

근대 개념의 본격적인 대학은 1883년 8월 독일인 뮐랜도르프와 영국인 +핼리팩스가 설립한 [통변학교]가 영어학교로 문을 열었으며, 1885년에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현 연세대 의대의 기원이 된 광해원과 배재학당이알렌 부부와 아팬젤라에 의해 각각 세워졌다. 1886년에는 여자대학 최초의 이화학당이 설립됐으며, 1897년에는 평양에 숭실학교가 세워졌다.

이를 계기로 신학교 설립이 잇따라 1901년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신학교(장신대)와 평양신학교(총신대)가 설립됐으며, 1905년에는 일반신학당(김신대)이 개설돼 신학교육의 터전으로 +자리잡았다. 같은해 고려대 전신인 [보성학교]가 이용익에 의해 설립됐으며 1906년에는 숙명여대 전신인 [명신여학교]가, 1908년에는 동덕여대 전신인 [동원여자의숙]이 건립됐다.

일제 강점기로 접어든 1910년부터 우리나라 교육제도는 복선형의 일본 학제를 따르게 되었고 1911년 9월에는 [조선교육령]이 공포되었다. 이 시기에 서울신학대학의 전신인 [성서학원]이 설립됐으며, 숭실학교는 1912년 3월 [숭실대학]으로 설립인가를 받아 [대학]이란 명칭을 사용하는 +최초의 학교가 되었다. 【취재 및 자료 지원 = 이일형 차장】

알림 : 김우종의 대학비사에 독자 여러분들의 참여를 받습니다. 해방 이후 지난 50여년간 대학교육 전반에 걸친 비사를 다룰 이번 기획에 자세한 애독 소감이나 제보, 증언을 주실 분은 본지 인터넷 전자신문(www.unn.net) [대학비사 코너] 또는 본사(TEL:2278-1105, FAX : 2263-2589, E-mail : leeih@unn.net)로 연락 바라며 채택된 분께는 소정의 고료도 지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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