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직후부터 잘못 돌아가기 시작한 현실은 중학교 2학년생이던 나에게있어서도 적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내가 겪은 몇가지 경험담을 통해 당시 상황을 가늠해보자.

미군이 처음 개성에 들어온 것은 45년 9월 13일이었으나 소련은 그보다한달여가 앞선 해방 직후부터 이미 지금의 북한땅 대부분을 점령해 들어갔다.

나는 고향인 황해도 연안읍에서 해방을 맞이했는데 소련군 몇 명이 38선을넘어와 손목시계 등을 약탈한 후 일본인 코주부네 집에 들어가서는 그 집 딸을 윤간하고 돌아갔다. 어른들은 그때 "로스케들이 저기서 지금 못된 짓을 하고 있는 중이야"라고 말했는데 나도 어른들 틈에 끼어 그 집을바라보고 있다가 집에 돌아가 어머니께 말하고는 큰 걱정을 듣기도했다.

개학이 되어서는 개성에 가 있으면서 미군들이 일본 여자들을 겁탈하는 실제 장면을 몇차례 목격하기도 했다. 개성 공설운동장 수용소에는 매일 많은 일본인들이 끌려왔는데 저녁만 되면 미군들은 총부리로 젊은여자들만 골라내어 앞세우고 숲 속으로 들어가 허여멀건 엉덩이를 내리고그 짓들을 일삼았다.

나는 친구들과 몰래 그들 뒤를 따라가 숨을 죽여가며 실제 포르노 장면을훔쳐보다가 도망치곤 했었다. 이런 걸 보면서 나는 어린 마음에 묘한 해방의 의미를 실감했다. 한국 여자들은 봐주고 일본 여자들만 겁탈하는 것이 이 땅에서의 해방의 의미라고.

이런 이상한 포르노를 구경하던 무렵에 이영철 선생(아동문학가)이 지팡이를 짚고 내가 다니던 송도 중학교에 나타났다. 부친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체포된 지 얼마 안되어서 자신도 끌려가 참혹한 고문을 당하고불구자가 되어 돌아 온 것이다. 그리고 며칠 뒤에는 친일파 선생들이 쫓겨났다. 애국자와 친일파가 교대한 것이다. 이때까지 나는 해방의의미를 나름대로 실감하면서 변화된 환경에 적응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다음해 1946년 봄에 이변이 일어났다. 지난해 쫓겨났던 친일 교사다카야마 선생이 다시 학교에 나타난 것이다.

"어이, 도미나가, 학교에 가지? 어서 타"

나는 아침에 등교하다가 갑자기 옆에서 급정거한 미군 짚차를 얼떨결에타게 되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창씨개명 때의 내 이름을 부른 것에 놀라기도 했지만 쫓겨난 친일파 교사와 함께 미군 짚차를 얻어 타고등교하는 모습을 다른 아이들이 보게 돼 창피했다. 그러면서 그가 왜 갑자기 그런 모습으로 나타났는지 한편으론 몹시 궁금했다.

그런데 이런 궁금증은 다음 날 온 교내에 소문으로 퍼져 곧 알게 되었는데, 그는 학교에서 추방되자마자 서울로 가더니 벼락출세 길을 달려군정청의 고위 관리가 되어서 학교로 찾아와 보복을 하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군정청 지시라는 명목으로 일장 훈시를 하며 불구자가 되어 돌아온 애국자 선생까지 앉혀놓고 겁을 줘 가면서. 그는 그 후 관재청장이 되었다.

또 다른 친일교사 도요가와 선생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그는 학무국은아니었지만 역시 군정청에 들어간 후 경찰 간부가 되어서 번쩍거리는 장식들이 요란하게 달린 옷을 입고 돌아와 교내를 한바퀴 돌며 시위를 하고 돌아갔다.

그때 한 체육선생이 운동장에서 우리들 틈에 있다가 그를 바라보며 내뱉은 말이 생생하다. "개판이군. 미친 개새끼들한테 또 물리게 생겼어"

해방이 되었음에도 세상 꼴이 이렇게 뒤틀려 버린 까닭은 과연 무엇 때문이었을까?해방 초기 구성된 한국교육위원회 성격에서부터 이 같은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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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0일 점령군으로서 군정장관에 임명된 아놀드(A. B. Annold) 소장은 일본인 관리들을 존속시킨 채 부처별로 미군 담당관을 임명, 본격적인 군정을 펴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한국에 대한 사전 정보나 준비가 거의 없었으며 더욱이한 나라의 행정을 지도할 만한 지식과 경륜을 갖춘 미군측 장교들을 갖지 못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 트루만이 후일 작성한 회고록에서도 이 같은 점을 짐작케 한다.

"2차대전전, 한국에 대해 아시아의 동쪽 먼 끝에 위치한 이상한 나라라는 정도 이상의 지식이나 관심을 가졌던 미국인은 거의 없었다. 극소수의 선교사를 제외하고는 1945년 미국 점령군이 한국에 상륙할 때까지미국인들에게는 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알 수 있는 기회는 드물었다"

9월 11일 교육담당관에 임명된 락카드(E. L. Lockard) 대위는 첫날부터총독의 마지막 학무국장이던 엄상섭의 자문을 받았다. 교육 전문가도 아니고 한국 실정에도 캄캄했던 그로서는 명령을 받고 일을 수행하는데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친일파 거물이라는 것만 빼고는해방 후 한국인의 교육문제를 미국인에게 말해줄 인물로 그보다 적임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엄상섭 등의 소개로 다음날부터 학무국에 참여하게 된 오천석, 백낙준 등 미국 유학파들은 이를 계기로 후에 문교부장에 오르는 등 미군정기 초 교육체제 주도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면과연 이들은 어떤 배경을 가졌던 인사들일까?

미군정 초기 교육 관련 단체는 9월 16일부터 자문 회의를 시작한 한국교육위원회를 비롯해 조선교육심의회와 뒷날 월북인사들이 많이 참여했던 조선학술원 등이 있었지만 특히 한국교육위원회는 각 도의 학무국장 이하 읍 면의 교장인사까지 도맡아 역할을 하는 등 막강한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조직에 참여한 인사 가운데 오천석, 유억겸, 김활란, 백낙준, 김성수, 김성달 등 핵심 맴버들은 미군이 상륙하기 전부터 이미 비정규적인 모임을 가져온 인사들이었다. 이들은 이화여전의 김활란이 주선한 천연동 모처에서 8월 하순 이후 3∼4회에 걸쳐 미군 진주 이후의우리나라 교육 문제에 대해 토의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모두 해방되던 날까지 교육계를 대표할만한 인물이었다. 그 중에서한국교육위원회에 참여한 인사들은 대체로 연희전문, 보성전문, 이화여전등을 대표하고 있었으며 김성달은 초등교육계의 대부로서 배경이 막강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는 일제 시대 친일 행위에 가담한 인사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의 친일 행위는 애국자들을 잡아다 족치던 경찰이나 독립군을잡으러 다니던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의 친일만큼 눈에 띄는 악독한 일들은 아니었지만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 경성기독교연합회, 조선군사후원연맹, 조선임전보국단부인대, 조선보국단부인대 등의 단체를 통해 우리 민족을 일제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몰아넣는 악의적인 선동과 기만적 연설을 주도했던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특히 우리사회의 지도적 인사로서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배신감이 컸고 교육계에 파급효과가 컸다는 점에서 당시 뜻 있는 지사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물론 이런 행위는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고, 학교 운영자로서 불가피한 경우도 있었다고 하지만 과거에 행한 과오에 대해 민족 앞에 솔직하게 고백하고 최소한 사과 한마디라도 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사과가 있어야 용서도 있고 화해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들의 과오는 비단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해방 후로이어졌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들의 친일 경력은 뒷날 민족교육 확립의 당위성과 다양성을 염원하는 민중들의 의지를 반영하는데 걸림돌로 작용했으며, 미군정의 비호 아래각도의 인사권마저 휘두르게 되면서 일제 잔재 청산을 바라는 열망에 부응하지 못했다. 그리고 3년간의 미군정을 거쳐 그 기반이 그대로 신생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면서 우리 교육계는 첫 출발부터 올바른 길을 찾기어려운 지경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쫓겨난 친일교사가 학무국 고위인사가 되어 학교에 다시 나타나 큰 소리를 치게 된 배경도 바로 이 같은 이유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그럼 이제 실세들의 이 같은 과거와 함께 이들이 속한 정당이나 계급관계, 출신학교와 종교관계 등 다양한 성향을 복합적으로 따져보면서 그것이군정 초기 우리 교육 방향에 어떤 모습으로 작용하고 여과되었는지 파악해보자 <다음호에 계속> 【취재지원=이일형 차장】

● 한국교육위원회(The Korean Committe on Education)

1945년 9월 12일 락카드의 요청으로 참여하게 된 오천석의 1차 임무는 미군정 학무국과 당시 한국의 교육지도자들과의 회담을 주선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락카드는 9월 16일 오천석 등의 추천으로 만난 교육계 인사들 가운데 1차로 16명을 다시 불러, 그들로 하여금 자문기관을 구성하기 위해 교육계를 대표할 전문가를 투료로 선출할 것을 제의했다.

그 결과 초등교육부문에 김성달을 비롯, 중등교육 현상윤, 전문교육유억겸, 고등교육 김성수 등이 뽑혔으며, 교육전반에 백낙준, 여자교육에김활란, 일반교육에 최규동 등 모두 7명이 선출되고 이들이 바로 한국교육위원회를 결성하는 핵심 맴버가 되었다.

그후 9월 22일에는 김성수가 교육담당관의 고문이 되고 군정장관의 추천으로 그 자리에 백남훈이 위원으로 취임하였으며 11월에는 의학교육에윤일선, 농업교육에 조백현, 학계 대표에 정인보 등이 참가하여 10인 위원회가 구성됐다.

한국교육위원회의 공식 성격은 자문기관에 불과했으나 실질적으로는 교육 전반에 걸쳐 중요한 모든 문제를 심의·결정하였고 각도 교육책임자 및 기관장과 같은 주요 인사문제를 다루면서 정치적 기반을 갖춘 교육 핵심 세력으로 급격히 성장했다.

(주)한국교육위원회=조선교육위원회는 동일한 기관으로 해방 후 혼용되었다)

미 군정 초기 교육 주도세력의 단체와 구성 인사
단 체 명주요 구성원
한국교육위원회유억겸, 김성수, 백낙준, 김활란, 김성달, 현상윤, 최규동, 윤일선, 조백현, 정인보, 백남훈 (감성수 후임으로 참여)
조선교육심의회하경덕, 백낙준, 김활란, 홍정식, +정인보, 유억겸, 김준연, 김원규, 이훈구, 이인기, 오천석, 최규동, +최우선, 현상윤, 이묘목, 사공환, 이호성, 이규백, 이승재, 정석운, 조동식, 고황경, 송석화, 서원출, 이홍종, 정문기, 장면, 조백현, 장이욱, 장덕수, 김애마, 신기범, 손정국, 허현, 유진오, 김성수, 박종홍, +조병옥, 최현배, 장지연, 조진만, 조윤제, 피천득, 황산덕, 김성달, 심효섭, 이용설
조선학술원박병래, 최상체, 고병간, 윤일선, 최규동, +정구충, 정문기, 이양하, 이원철, 박동길, 최경열, 조백현, 이병도, 윤일선, 김준연, 최현배, 이태규, 김계숙
조선교육연구회최현배, 조윤재, 사공환, 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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