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하순의 어느 날.

연희전문, 보성전문, 이화여전을 대표하는 유억겸, 백낙준, 김성수, 김활란 등은 서대문구 천연동 소재 김활란의 친구집에 모여 미국을 맞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여기에 김활란과 같이 컬럼비아 대학 교육학 박사를 거친 오천석이 참석했다.

"학제는 어떻게 할까요? 내 생각으로는 6·3·3·4제가 좋을 듯한데 …""예, 미국의 일부 주에서는 6·3·3·4제를 새로 실시하고 있는데 인기가높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같이 가난한 형편에서는 중등교육과정이 6년이나 5년이 되면 학부모들의 부담이 커서 중도에 학업을 중단하는 일도 많으니까…"

김성수의 제안에 오천석은 이렇게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지금의 교육제도인 6·3·3·4제가 해방 후 처음 모인 이들 천연동 그룹에 의해이미 구체적으로 논의되고 있었다.

한국교육위원회의 핵심세력으로 성장하게 되는 이들이 이미 미군 진주이전부터 모임을 갖고 한국 교육체제 전반에 대해 의견을 나누게 된 것은교육배경이나 학문, 사회적인 영향력에 비춰 미군정과 스스로 상당한 관계가 맺어질 것을 확신한데서 나온 행동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들은 친일 경력 등으로 떳떳하지는 못했지만 당시 교육계를 이끄는 대표자 그룹이었으며 미군 교육담당관 락카드 대위를 만난 이후부터는 우리 교육계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실세가 되었다.

이 당시 교육 단체는 유억겸, 김성수 등 11명이 참여한 한국교육위원회를 비롯해 오천석 등 60여명이 참여한 조선교육심의회와 이병도 윤일선 등 20여명이 참여한 조선학술원 등이 있었지만, 특히 한국교육위원회는 각 도의 학무국장 이하 읍 면의 교장인사까지 도맡아 하는 등 막강한영향력을 행사했다.(339호 기사 참조)

그렇다면 미군정 3년간 한국교육계를 좌우했던 이들의 출신 성향이나 배경은 어디에 바탕을 두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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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교육위원들의 성향을 분석하려는 경향은 미군정을 재해석하려는 의식이 확산되면서 시작됐다. 그간 학계에서 나온 논문을 토대로 이들의 성향을 분석해보면 몇가지 점에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유억겸, 김활란, 안재홍, 송석하, 장면 등 미군정 초기 교육 활동에참여한 인사는 대부분 양반이나 관료, 중산층 이상의 계급에 속한 보수적 인사가 많았다.

또 이들의 학력은 미국이나 일본, 중국, 영국 등지에서 고등교육을 마친 고학력자가 대부분으로 특히 미국의 컬럼비아대학과 일본의 도쿄대학 및와세다대학, 그리고 한국의 경성제대 졸업생 출신들이 인맥을 형성했으며안재홍, 김활란, 정인보, 조병옥 등 기독교계 인사가 많았다.

이들은 특히 김성수, 유억겸, 김준연, 백남훈 등 한민당과 관련을 맺은인사가 30여명, 흥사단에 관여한 인사가 30여명, 이와 유사한 우익계열의 족청 인사도 10여명에 달했다.이밖에도 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일제 시대 교직에 몸담으면서 친일 또는 부일 행각을 벌였다는 점 등을 주요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중산층 이상이라는 계급성과 친일, 한민당과의 관계 등은 모두 하나의 뿌리에서 자라난 것임을 짐작하게 된다.사실 일제의 특성으로 볼 때 중산층 이상의 여유 있는 생활을 유지하려면독립투사나 그 후원자로 계속 남아있기는 어려운 세상이었으며, 반대쪽에 더 가까운 인물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일제로부터 미움을 샀던 중산층들은 대개 몰락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친일 인사가 적지 않았다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는 그들의 배경과 그리 무관할 수 없었다.

한민당이라는 것도 그렇다. 김성수, 유억겸, 안호상, 백낙준, 현상윤, 장지영 등 교육 위원 다수가 한민당에 관여했으며 흥사단에 복수로 소속된 인사가 적지 않았다. 그렇다면 한민당은 어떤 정당이었던가? 이승만을 대표로 하는 한민당은 친일인사들까지 모인 보수 우익 정당으로 그들이어떤 역할을 해 나갔는지는 이미 역사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결국 참여 인사들의 이같은 색깔들이 여과되면서 미군정 초기부터 우리교육은 중앙집권적, 하향적, 보수주의적 색체를 띠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같이 경향이 뒷날 민족교육의 실패와 분단 고착화로나타났으며 민족 다수가 염원하던 친일 청산과 역사적 심판은 요원한메아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우리처럼 나라를 잃고 살아남고 또 다시 강대국에 점령당한 민족으로서 올바른 민족적 자각보다 더 중요한 교육이 어디 있었을까? 그리고 이 당시 민족교육으로서 가장 시급한 실천적 과제의 하나는 분단 고착화를 막는 것이 아니었던가?

친일 청산과 역사적 심판 역시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 친일 청산없는 민족교육이 있을 수 있을까? 일본어 중심에서 한글교육으로 전환했다지만 이것만으로 마치 민족교육을 수행한 것으로 이해된다면 이는헛 구호요 기만일 수밖에 없다. 특히 미군정 3년이 지난 뒤 구성됐던 [반민특위]마저 경찰에 의한 백주의 태러로 무산되면서 친일파에 대한 역사적 심판은 이 땅에서 요원하게 되었다.

물론 이 같은 잘못을 교육계 인사들만의 것이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따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의 이해가 당시 미국이 원했던 점령정책과 일치했기 때문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미군정의 교육정책이나 이념의 큰 틀은 소련과의 대치상황을 고려해 그들의 이익이나 이해를 최우선으로 반영시키면서 교육계에 반공·보수·우익의 논리를 강요했던 것이다.

특히 미군정은 해방 후 한국사회가 일제 황민화 정책에 의해 교육계를 이끌 인재가 부족하다고 판단, 사회의 중요정책 중 하나인 교육정책도한국사회에 대한 올바른 파악없이 수립, 실행함으로써 일본식 교육방법과미국식 교육제도를 접목하는 기형을 낳게 되었다.

결국 미군정은 참여 인사 중 이해관계가 맞는 일부 교육 관료들과 중요한 일들을 처리함으로써 해방 후 당면 과제인 분단과 교육자 부일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으며 우리나라 교육에 있어서는 씻을 수 없는 오점을남겼다. <다음호에 계속>【취재지원=이일형 차장】

@ 교육 주도 세력 4인방의 친일 행각

천연동 그룹으로 대표되는 실세 그룹들의 성향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들은 향후 한국 현대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인물로 공과에 있어서는 아직도사가들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반민족문제연구소가 해방 50주년을 맞아 발간한 친일 관련 사료를 토대로 과거 행적을 되짚어본다.

● 유억겸 : 한말 개화파 태두로 갑오개혁의 핵심인물인 유길준의 둘째아들 유억겸은 1922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바로 연희전문 교수가 됐으며, 부학감, 부교장을 거쳐 해방 후 교장이 되었다.

형 유만겸이 시종 일본 총독부 관료로 출세 지향적이었던데 반해 처음에는부르주아 민족운동에 참여했던 유억겸은 YMCA와 조선사정연구회 등 민족주의 계열의 활동에서 이승만 동지회와 연관을 맺었던 흥업구락부 사건이 터져 가담자로 몰리면서부터 '친일군상'의 길에 들어선 것으로 알려진다.

이후 그는 1938년 기독교 조직의 친일회에 가담한 것을 시작으로 1939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의 제3분회장, 흥아보국단 준비위원, 임전보국단 이사, 학도병 종로익찬회, 언론보국회 명예이사 등 일제 말기 친일 단체의 본산에서 자신의 학생들을 전장으로 몰아넣는데 일조했으나 해방 후 미군정청의 학무국장이 되었다.

● 김성수 : 사가들에게 양극단의 평가를 받는 김성수는 1914년 일본와세다 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1919년에는 경성방직주식회사를, 1920년에는 동아일보를 설립했다. 이후 1945년에는 한국민주당,1949년에는 민주국민당을 창당하고 1951년에는 부통령에 당선되는 등 교육·언론·정치 등 한국 현대사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그러나 본인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그는 몇 가지 점에서 친일 행각을 모면할 수 없게 된다. 그는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직후부터 이른바 '시국강연'의 연사로 참여함으로써 일제의 전시동원정책에 협조했으며, 1938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및 이사로, 1941년에는 흥아보국단 이사 및 임전보국단의 감사로, 1943년에는 당시 보성전문 교장 자격으로 총독부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징병제와 학병제를 찬양하는 장문의 논설을 게재하는 등 해방 이전까지 학병을 권유하는 각종 담화와 논설, 학부모 간담회 등에 참여, 친일에 가담했다.

● 백낙준 : 제자를 침략전에 내몰고도 추앙 받는 교육자 백낙준은 미국 예일대학을 나온 엘리트 유학파로, 귀국해서는 연희전문 교수직을 맡으면서부터 친일 연사로 활동해 '나의 길 나의 노래'(1927년)를발표하는가 하면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이사로 참여하면서 친일좌담회인[미·영 타도좌담회]에서 '대동아전쟁의 숭고함' 등을 역설했다.

특히 당시 대표적인 친일단체인 조선언론보국회와 조선기독교연합회, 기독교신문 등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43년 12월에는 친일신문인 [매일신보]에 '영원히 광망 뻗도록'이란 기고문을 발표하는 등 언론과 기독교단체를 통해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동조하는 주장과 논설을 폈다.

그러나 그는 해방후 항일 투사로 미화되면서 1951년에는 문교부장관에, 1957년에는 연희전문과 세브란스의전이 통합된 연세대 초대총장에오르면서 연세대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으며 1958년에는 반공연맹 아세아지구 의장으로, 1960년에는 초대 참의원 의장에 오르는 등 정계와 교육계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하는 민족주의자로 변신했다.

● 김활란 : 여성 교육의 대모로 알려진 김활란은 1918년 이화학당을 졸업한 후 1931년 컬럼비아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 이화여전 등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1937년부터 총독부가 주관하는 방송선전협의회,애국금채회 등에 참여했으며, 임전대책협의회, 임전보국단 등 일제의 황민화와 내선일체, 침략전쟁을 지원하는 각종 관변단체 간부로활동하면서 친일 행각을 벌였다.

1941년에는 임전보국단결전부인대회 및 강연회에, 1942년에는 싱가포르 공략 대강연회에 연사로 참여했으며, 이화여전 교장으로 있던 1942년 12월[신세대] 잡지에 '징병제와 여성의 각오'라는 글에서는 '전쟁에 나간 남편이나 아들의 유골을 눈물 없이 맞자'고 주장하는 등 어처구니없는 논설과 강연을 일삼았다.

그러나 그는 해방 후 이화여대 총장과 배화학원, 국제대학, 동구학원, 금란여중고 등 여러 학교의 이사장을 맡았으며, 6·25 때는 공보처장, 1965년∼70년에는 대한민국 순회대사, 한국아시아연맹 이사 등 정치활동에까지 참여, 사후에 대한민국 일등수교훈장을 받기도 했다.

□ 알림

[김우종의 대학비사]에 독자 여러분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아울러 본지 대학비사(337호) 기사 중 일부 내용에 대해 숭실대 홍보팀의 이의제기가 있었으나 지면 관계상 반론문을 인터넷 [독자제언] 코너에수록하오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숭실대 홍보팀은 대학 설립과 관련 '숭실대가 대한제국 시대 고종으로부터처음 인가 받아 1906년 첫 고등교육을 실시한 유일한 대학'이라는 등의 논지로 성균관을 고등교육의 기원으로 삼은 본지 기사 방향에 문제점을 +지적했으나 이는 근대교육의 개념을 보는 역사 인식의 차이로 이에 대한 입장을 자세히 서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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