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로냐 프로세스' 등 고등교육 국제적 추세는 '자율성' 확보

[한국대학신문 이재 기자] 조각조각 흩어져 있는 국내 고등교육 관련 법체계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학계를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다. 현재 ‘령’ 수준에 머물고 있는 국립대와 사립대를 법률로 설립근거를 명확히 하고 진흥을 꾀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국내 교육법 체계는 교육기본법을 기반으로 영유아교육법, 초중등교육법, 고등교육법, 평생교육법 등으로 이뤄져 있다. 고등교육법은 고등교육기관인 대학과 관련 기관들의 설치근거에 해당하지만 국립대와 사립대 설치에 대해서는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 때문에 국립대의 설치와 운영은 법률보다 한 단계 낮은 시행령 수준인 ‘국립대학 설치령’에 근거하고 있다. 사립대는 사립학교법을 통해 설립근거 등이 규정돼 있지만 이 법은 대학뿐만 아니라 초중등교육기관을 모두 아우르는 법이다. 이처럼 대학 설립의 근거가 조각나 있고 시행령 등 낮은 단계의 법률에 근거하고 있어 최근 대학의 자율성이 심각하게 침해당하고 있다는 게 학계의 진단이다.

임재홍 한국방송통신대 교수(법학)는 “국립대의 법적 지위가 중요하다. 최근 교육부는 강도 높은 대학구조개혁을 추진하면서 총장직선제 폐지 등을 강요하고 극단적인 사회 양극화를 야기하는 행정을 반복하고 있다. 이같은 임의적인 행정을 방지하고 대학의 자치를 회복시키기 위해 고등교육기관의 구조와 운영체제를 규율하는 국립대학법과 사립대학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임재홍 교수는 “교육부가 추진해온 지난 20년간 교육정책은 사실상 실패했다”며 “사립대에 대한 상업화 정책은 결과적으로 적립금 누적과 법인의 부실화, 비리의 증가 등에 직면했고 국립대에 대해서는 총장직선제 폐지와 성과연봉제 도입, 국립대학 회계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 제정으로 공적책임을 방기하는 정책이 추진됐다”고 지적했다.

교육부는 지난 2010년 1단계 국립대 선진화 방안을 발표하며 서울대를 법인으로 전환시키고, 각 국립대의 학장 직선제를 우선 폐지했다. 이와 동시에 성과연봉제를 도입해 국립대 교수들의 거센 비판에 직면한 바 있다. 이어 2012년에는 2단계 국립대 선진화 방안을 통해 성과연봉제를 확산시켰고 국립대 총장직선제 폐지를 강조했다. 또 국립대 기성회회계의 법적 근거가 모호하고 재정운용이 어렵다는 것을 명분으로 국립대 재정회계법을 추진했다. 이 법은 2015년 국립대학 회계 및 재정운영에 관한 법으로 제정됐다.

그러나 이들 정책의 성과는 미비하다. 특히 국립대 총장직선제는 사회적인 반대여론에 부딪힌 대표적인 사안이다. 지난해 부산대 한 교수가 국립대 총장직선제 폐지에 반대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대표적이다. 최근 국회도 교육부의 총장직선제 폐지 정책이 무리했다는 비판이 고개를 들고 있다. 지난달 열렸던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들은 교육부의 행정태도는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수준이라며 비판의 수위를 높인 바 있다.

임재홍 교수는 “이같은 교육부의 정책이 실제로 성과를 냈는지 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다”며 “현재 국제적인 추세는 대학의 자율성과 자치를 폭넓게 인정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1999년 출범한 볼로냐 프로세스가 대표적이다. 볼로냐 프로세스는 영국과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4개 유럽연합 소속 국가들이 2010년까지 단일한 고등교육제도를 설립해 유럽대학의 국제 경쟁력을 높이고자 출범한 프로그램이다. 현재 회원수가 47개까지 늘었다. 이 프로그램이 제시한 고등교육의 3대 원칙은 △학문의 자유와 대학자치 보장 △국가의 공적 책임 인정 △대학의 사회적 책무 요구다. 이와 함께 2006년 유럽평의회는 학문의 자유와 대학자치에 대한 권고를 발표해 연구와 교육에서의 무제한적 자유를 선언하기도 했다. 유럽평의회는 또 대학과 사회의 근접성과 협력 강화를 제창하며 대학의 사회비판을 위한 일정 간격 또한 동시에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립대도 다르지 않다. 사립대는 사립학교법을 구색이 갖춰져 있지만 사립학교 전반에 대한 법규정이라 대학에 온전히 적용하기엔 무리가 있다. 특히 사학의 자주성과 공공성에 대한 내용이 명확하지 않아 사실상 대학의 자율성을 보장하기보다 학교법인의 재산권을 보장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는 게 문제다.

박순준 한국사립대학교수회연합회 이사장(동의대 교수)은 “현재 사립학교법은 공공성에 비해 특수성과 자주성이 너무 강조돼 사학법인의 권리만 과보호되고 있다”며 “과거 참여정부 당시 이런 내용을 개정했으나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의 끈질긴 반대로 2007년 재개정돼 유명무실해졌다”고 설명했다.

박순준 이사장은 “여건이 크게 다른 초중고등학교와 대학이 하나의 법률에 묶여 있음으로써 법 내용이 복잡하고 동일한 조항을 여건 차이로 인해 정반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발생해 사학법 개정 자체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초중고등학교와 대학의 관할청이 교육부와 지방교육청으로 나눠진 만큼 법률적으로도 둘을 분할하는 것이 옳다”고 진단했다.

국립대학법과 사립대학법 제정 필요성이 제기된 이면에는 최근 김선동 새누리당 의원이 발의한 대학구조개혁법의 영향도 있다. 국·사립 교수들 대부분은 대학구조개혁법이 대학교육을 왜곡시키는 ‘악법’이라고 입을 모았다.

대학구조개혁법의 핵심은 대학평가를 통한 부실대학의 퇴출이다. 지금까지 발의된 대학구조개혁법의 주요 내용을 보면 △대학자체구조개혁 법적 근거 마련 △대학평가위원회·대학구조개혁위원회 설치 △대학평가 통한 구조개혁 자료 확보 △사립대학법인 자진 해산시 잔여재산 전부 또는 일부를 설립자에게 귀속 △유휴 교육용 기본재산 용도 변경 허용 등이다.

임재홍 교수는 “대학교육의 질 향상에 대한 방안이 명확하지 않고 단지 대학의 양적 축소에 초점을 두고 평가를 통한 강제적 정원감축을 합리화하는 내용”이라고 비판했다. 박순준 이사장 역시 “사학의 고질적인 문제를 잘못된 문제풀이로 해결하려는 개악법안”이라고 평가절하했다.

그렇다면 대학을 위한 법체계 정비가 실현될 수 있을까. 정치권은 긍정적이다. 유성엽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장(국민의당)은 “대학문제 해결을 위해 대학의 법적 체제를 정비할 필요성에 적극적으로 공감한다”며 “중지를 모으고 정부의 협조가 있다면 제정에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교육부 역시 일단 법안제정에 이견은 없다는 입장이다. 배성근 교육부 대학정책실장은 “국립대를 법률로 지위를 만드는 내용에 공감한다. 교육부도 좋은 방안을 마련해보겠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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