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은성(본지 논설위 /서울시립대 교수)

지난 5월 9일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가 별세했다. 손 교수는 아는 사람은 다 알만한 커다란 족적을 남긴 분이다. 독학으로 도시에 대해서 연구해 1970년대 강남지역의 도시계획을 구상하고 개발을 진두지휘한 우리나라 제1호 도시학자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손 교수의 업적을 논하고자 함이 아니고 그 분과의 마지막 조우에서 느낀 것을 공유하고자 함이다.

손 교수는 몇 해 전부터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대학에 와서 점심식사를 하신 듯하다. 아마도 당신이 반평생 몸담으셨던 대학이 이렇게 마음과 삶에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이분이 작년에는 어떠한 연유인지 학생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학생식당을 자주 찾는 필자는 손 교수와 함께 자리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이때의 조우가 시간으론 매우 짧았지만 대화 중 이분의 한마디는 잊혀지지 않는 강력한 것이었다. 근황들을 묻자 손 교수는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였지만 “나는 사는 재미가 하나도 없어!”하고 소리쳤다. 이미 오래전에 사별하고 자식들도 곁에 두지 않고 여든 중반을 넘기니 이제 가깝던 멀었던 친구들이 거의 다 세상을 떠나가고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을 알아봐주고, 또 추억이 남아있는 대학을 매일 빠지지 않고 나왔을 터인데, 그나마 이제는 알던 후배교수들도 대부분 학교를 떠나고, 마주치는 젊은 교수들은 인사는커녕 눈치만 주니 교수식당엘 더 들릴 기분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섭섭함과 처절한 외로움을 “사는 재미가 하나도 없어!” 한마디로 내뱉은 것일 게다. 이렇게 느끼는 순간, 이것이 20년 후의 내 모습이겠다는 깨달음이 절박한 위기감으로 다가왔다.

더구나 손 교수가 어떤 사람인가? 외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 ‘강남’을 탄생시킨 주역 아닌가? 이런 분이 은퇴하고서 사람들로부터 잊혀져 몸담았던 대학에서조차 알아봐주는 교수가 한 명도 없어 교수식당을 떠나게 된 것이다. 이런 무관심의 모습이 우리 대학사회의 진면목은 아니어야 하지 않겠는가?

또 다른 교수의 죽음이 떠오른다. 작년 8월 17일은 부산대 국문과 고현철 교수가 학교건물에서 투신해 세상을 뜬 날이다. 대학이 교육부의 강압을 뿌리치고 직선제로 뽑은 총장이 직선제를 포기하고 교육부 방침대로 간선제로 돌아선 것에 대해 총장 직선제를 유지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운명을 달리했다. 고 교수가 진정 알리려고 한 것은 민주주의 수호의 최후보루인 대학에서조차 민주주의가 훼손되고 있음이다. 그리고 대학이 자율성 잃는 것에 대해서 도통 무감각하고 무관심한 교수들에게 각성을 촉구했던 것이다. 그의 희생이 딱 1년 지난 지금, 우리 대학들은 그가 외쳤던 민주주의와 자율성을 수호하고 있는가? 아니 그런 노력을 조금이라도 하고 있는가? 답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동료의 엄청난 희생의 외침이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무관심의 현실이다. 민주주의의 훼손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바로 이 무관심이 아닐까? 약자와 소외자에 대한 무관심, 부정과 불의에 대한 무관심, 독선과 비위에 대한 무관심. 사람들 사이에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이 서로 다르다는 얘기를 들은 바가 있다. 살면서 점차 맞는 말인 것 같이 느껴진다. 그런데 그 능력이 크다고 해도 행동으로 반응하지 않으면 별 차이가 없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 행동으로 반응하는 일이 그리 대단하고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어렵고 외로운 사람에게 “힘들지?”해주고, 부정함을 지적하는 사람에게 “잘 하고 있다“며 등 두드려 주는 그런 것이 몹시 아쉬운 시절이다. 이렇게 떠들면서도 필자 스스로도 관행의 익숙함에 빠져서 외면하려하고 현실에 안주하려고 하고 있다. ”바쁘다“는 핑계를 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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