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관 연세대 교수(노어노문학)

2000년 러시아 정부로부터 푸시킨 메달

루스타벨리 작품 10년간 번역 출간 2016년 조지아 대통령상 받아

[한국대학신문 황성원 기자] “돌이켜보니 번역만 10년이 걸렸더군요.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번역을 할 수 있냐고 묻는데 제 신조가 ‘꾸준히, 천천히, 열심히’입니다. 결국 엉덩이 힘으로 하는 거죠. 나중에 보면 스스로도 ‘내가 이렇게 했었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거짓말 같아요. 참 열심히 살았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빛바랜 책들이 들어찬 연구실 안 작은 테이블에 조주관 교수와 마주 앉았다. 조 교수가 직접 내려준 커피에서 뜨거운 김이 올라온다. 2017년 1월 조 교수는 조지아 대통령상을 받았다. 조지아 대서사시 쇼타 루스타벨리 작품 『호피를 두른 용사』를 10여 년 걸쳐 번역·출판한 공로였다. 긴 시간 동안 한 작품에 파묻혀 지낼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제가 고려대 러시아문학과 1기입니다. 대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갔습니다. 그때 도스토옙스키의 『카르마조프의 형제』를 읽었죠. 감동이 대단했어요. 그때 결심했습니다. 러시아문학을 공부해보자고 말이죠.”

새로운 것에 뛰어들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셰익스피어와 같은 영미문학작품들이 대부분 사람 손에 쥐어져 있던 때였다. 고려대에서 학사 학위를 받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쳤다. 이후 국비 장학생으로 선발돼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대학원 슬라브어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던 때 그의 나이 서른여섯이었다.

“미국에서 수업을 듣는데 한 강의에 대학원생이 30명 가까이 됐어요. 왜 이렇게 많은지 의아했죠. 물어보니 취직이 잘된다고 하더군요. 대부분 일찍 학위를 받고 정보국 쪽으로 빠졌어요. 소수만 남아서 공부를 했는데 러시아 문학 중독자들이었죠. 말 그대로 그것밖에 모르는 얘들. 저도 포함되는군요. (웃음)”

그는 당시 러시아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소회를 밝혔다.

“당시 역사나 철학의 정의에 관해서는 많은 학자가 이야기했지만, 문학이란 무엇인지 정의를 내린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야콥슨은 최초로 ‘문학은 언어의 예술이다’라고 말했죠. 문학을 전공한 저에게 상당히 큰 물결로 다가왔습니다. 빠져서 공부할 수밖에 없었죠.”

누군가 한 번도 밟지 않은 길에 발자국을 남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는 미국에서 학위를 마치고 러시아로 건너간다. 한국과 당시 소련이었던 러시아가 경제협력을 위한 협정을 맺은 1991년이었다. 그는 한국에 있던 러시아문학회를 이끌고 현지 세계문학연구소와 각종 아카데미 담당자들과 만나 업무협약(MOU)을 맺고 학술 교류를 했다. 이곳에서 『호피를 두른 용사』라는 작품과 조우하게 된다.

“1995년도였어요. 러시아로 학술대회 발표를 하러 갔죠. 학자들끼리 이야기하는데 대부분이 푸시킨 같은 19세기에 유명했던 작가들 이야기만 하더군요. 그때 11세기부터 18세기까지 문학 작품을 연구해야겠다고 결심했죠. 함께 있던 세계문학연구소에서 일하던 김레오 교수가 저에게 12세기 작품인 쇼타 루스타벨리의 『호피를 두른 용사』를 꼭 읽어보라고 추천하더라고요.”

그의 나이 불혹이었지만 ‘미개척’ 분야에 대한 갈증은 여전히 해갈되지 않았다. 냉수를 들이켜듯 11세기부터 18세기에 이르는 러시아 문학 작품을 한국 최초로 30권의 책으로 번역해낸다. 그중 하나가 12세기 작품 『호피를 두른 용사』다.

“특히나 『호피를 두른 용사』는 운문이다 보니 책이 두껍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이 잘 안 사는 것 같아요. (웃음) 번역을 끝내고 보니 아주 재밌는 점이 있습니다. 이 작품이 지난해 한국에서 히트를 했던 드라마 ‘태양의 후예’랑 내용이 똑같아요. 주인공 4명이 헤쳐 나가는 에피소드가 정말 비슷해요.”

그는 드라마 한 편을 보더라도 문학 작품을 떠올리고, 강의 구상을 할 때도 문학으로부터 영감을 받는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해 호수에 빠지는 나르키소스 그리스 신화에 영감을 받아 학생이 주체가 되는 강의 콘텐츠를 만드는데 열심이다. 정년까지 3학기를 남겨둔 그는 러시아 문학과 관련된 분야에서 각 100개씩의 동영상 콘텐츠를 만드는 게 목표다.

“문학은 삶에서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는 응용학문만 가지고 살 수 없어요. 대학 구성원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어느 한 시대를 앞서가면 비즈니스가 되고, 두 시대를 앞서가면 개혁, 세 시대를 앞서가면 예술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문학은 시대보다 앞서가는 예술입니다. 이성보다 감성이 주는 힘을 믿으세요.”

커피로 가득 차 있던 컵이 밑바닥을 보이며 푸르스름한 연구실 형광등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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