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영 서강대 로욜라도서관 수서정리팀 부장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보면 먼저 읽은 독자가 남겨놓은 발자취를 발견할 때가 있다. 특정 페이지에 포스트잇이 붙어 있기도 하고 밑줄을 치거나 살짝 느낌을 적어놓은 경우도 있다. 때로는 책속에 글을 적은 메모장이 남겨져 있는 경우도 있고 책 위치를 적어놓은 분류번호, 책갈피, 철 지난 연극표, 영수증, 책 한 구절을 적어놓은 쪽지, 말린 나뭇잎, 급하게 적어놓은 듯한 전화번호도 있다.

왜 이곳에 표시를 해놓은 것일까? 쪽지에 적혀 있는 전화번호, 영수증, 연극표에는 어떤 사연과 추억이 담겨 있을까? 전화번호에는 어떤 설레임이 있었을까? 말린 나뭇잎은 이 책을 읽을 다음 독자를 위해 일부러 남겨놓은 것은 아닐까? 책을 읽는 도중에 발견되는 단서들을 통해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도 즐겁고, 표시돼 있는 곳의 앞뒤를 읽어보며 먼저 읽은 사람의 생각을 더듬어 보는 것도 책을 읽는 재미 중 하나다.

도서관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 중 하나가 책에 낙서를 하거나 훼손하는 행위다. 다른 이용자를 위한 배려이자 자원을 공유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예절이기도 하다. 수험서나 문제집에 답을 적어놓으면 그 책은 더 이상 필요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없다.

그렇지만 간혹 책속에 남겨져 있는 메모가 반가울 때도 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시각이나 느낌을 다른 사람을 통해 전달받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먼저 이 책을 읽은 이용자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생각을 공유하고 의견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즐겁다.

영국의 작가 찰스 램은 친구인 작가 새뮤얼 데일러 콜리지에게 책을 빌려주고 돌려받을 때 책 속에 남겨져 있는 쪽지를 귀하게 여겼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책을 빌려주려면 콜리지 같은 사람에게 빌려줘야 한다. 엄청난 이자를 붙여 돌려주니 말이다. 주석을 달아 책의 가치를 세 배로 불려줄 것이다.’라고 했겠는가. 콜리지의 메모는 후에 다섯 권의 책으로 출간됐다고 한다. 그러기에 도서관 서가에서 무심코 집어든 책을 읽어 내려가다 발견되는 앞선 독자의 흔적들은 단순한 휴지조각이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건이 아니라 다음 독자를 위한 가이드이자 상상의 나래를 위한 열차표, 시간을 초월해 연결되는 인연의 끈이다.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생각이나 느낌이 공유되는 것이 아닌 보내는 사람의 마음이 숙성돼 한참 후에 전달되는 손편지의 낭만이 깃든 애정의 징표다.

예전에는 책을 대출한 사람과 날짜를 적어놓은 표를 넣어 두던 북포켓이 책 뒷장 안쪽에 있어 먼저 책을 읽은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같은 책을 읽은 사람들끼리의 에피소드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책을 읽은 사람과 읽을 사람이 연결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래서 더욱 이런 단서들이 소중한 것은 아닐까. 뒤에 읽을 독자를 위해 난 책 속에 어떤 단서를 남겨놓을까? 책을 읽는 재미만큼 책을 통해 연결될 인연이 반갑고 정겹다.

 

<한국대학신문>

저작권자 © 한국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