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부흥보다 인성과 도덕성 함양이 우선돼야…

극단적 이기주의가 문제, 해결 방법은 인성과 도덕성의 회복

집단 고독 증후군을 치유하는 사람이 21세기 지도자가 될 것…

[한국대학신문 이다희 기자] 한국대학신문이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아우르는 새로운 기획물을 준비했다. 이인원 전 KBS 심야 토론 MC이자 현 한국대학신문 회장이 진행하는 '살며 생각하며'는 우리나라의 각계 원로를 만나 그들의 살아온 인생을 조명하고 우리 사회 문제와 미래에 관해 얘기한다. 자서전과 역사 기록물의 성격을 갖는 대담 프로그램으로 유튜브(http://www.youtube.com)와 한국대학신문 홈페이지(http://news.unn.net/)에서 볼 수 있다.

대담의 첫 번째 주인공은 홍일식 전 고려대 총장이다. 2시간 넘게 진행된 대담에서 솔직하게 자신의 얘기를 풀어낸 홍 전 총장은 시종일관 인성과 도덕성의 회복을 강조했다. 한국적인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국문학의 거장이자 청년 교육 문제에 관심이 많은 홍 전 총장의 얘기는 세대를 아울러 우리에게 많은 울림을 준다.

-《나의 조국 대한민국》 책 서문에 있는 ‘시간이 없어 공부 못하는 사람은 시간이 있어도 못할 것이다’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절실한 체험에서 나온 말이다. 조지훈 선생에게 민족문화연구소를 물려받았다. 당시 인문과학 연구하는 데가 다 그렇듯 아무것도 없는 빈집이었다. 이 연구소를 세계적인 연구소로 만드는 데 고생을 많이 했다. 제일 분주하고 바빴던 이때 논문을 가장 많이 썼다. 돈도 마찬가지다. 당시 학교와 정부에서 돈을 지원받은 게 없다. 직접 돈을 마련해서 사업을 했다. 한국문화사대계 전 11권, 한국민속대관전 7권을 펴냈다. 중한 대사전은 국교도 없을 때 20여 년에 걸쳐 완성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돈이 없어서 일 못한다는 사람은 돈이 있어도 못하는 사람이다. 후배, 제자에게 자주 말하다 보니 이 말이 고려대에서는 신화처럼 내려온다고 하더라.”

- 《문화 대국으로 가는 길》 책 서문에서 인성과 도덕성을 강조했는데 다른 의미가 있는지.

“정치가 혼돈이고 경제가 어렵다고 하지만 그보다 인성의 함양과 도덕성 회복이 더 중요하다. 국민소득이 3만 달러에 가깝다고 하는데 인구가 날로 줄어들고 젊은 사람들이 결혼도 하지 않는다. 자살률도 OECD 국가 중에 제일 높다. 젊은 세대가 국가 사회를 원망하는데 경제가 부흥되면 뭐 하나. 국가 망하는 것이다. 집안은 자손 끊기면 망하고 국가는 인구가 줄어들면 망한다. 이게 다 이기심 때문이다.”

▲ 이인원 회장

- 우리나라 교육이 경쟁만 가르치지 않나. 그런 데서 오는 거 아닌가.

“그렇다. 경제 부흥을 하는 데만 신경 썼지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건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기성세대의 책임이다. 빵을 많이 만들려고만 했지 이 빵을 어떻게 공평하게 나눌 것인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 인성 문제에서 효를 강조했는데.

“인성의 기본은 효에서 시작한다. 사람이 제일 먼저 나 아닌 남을 의식하는 게 부모다. 가장 처음 관계를 맺는 부모와 자식 간에도 이기적으로 돼버리니 문제다. 돈 때문에 자식이 부모를 배반하는 것뿐 아니라 더 끔찍한 일도 한다. 이런 판국에 경제가 부흥하면 뭐 하나. 인성 함양과 도덕성 회복부터 해야 한다.”

- 세대 간의 갈등이 심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보수하고 진보의 차이가 있겠고 근시와 원시라는 차원에서 볼 수도 있다. 젊어서는 근시지만 나이가 들면 원시가 된다. 시력뿐만 아니라 사고방식도 마찬가지여서 젊어서는 눈앞의 것을 보고 나이 들수록 멀리 보는 안목이 생긴다. 우리나라가 압축 성장을 했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건지 헤아리지 않고 돈만 벌면 되는 줄 알았다. 문명사회의 큰 흐름이긴 하지만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됐다. 산업사회 이후에 인간의 편의를 도모하고 굶주림도 면했지만, 인간의 얼굴을 잃어버렸다. 이걸 회복하기 위해 가장 절실한 게 인성과 도덕성의 회복이다.”

- 한일관계는 어떻게 풀어야 하나.

“임진왜란이 정유재란까지 해서 7년 장기 전쟁이었다. 그 피해와 억울함은 말로 표현을 못한다. 그 일을 겪고도 불과 9년 만에 국교를 정상화했다. 그 당시 에도와 한양을 왕복하는데 6~10개월 걸렸다. 그런데도 국교가 정상화된 걸 보면 이웃 간에 도저히 벽을 쌓고는 살 수가 없다는 것이다. 현재는 몇 시간이면 도쿄를 왕복한다. 해방 후에 근 20년 넘게 국교를 닫고 있었던 것이 오히려 기적 같은 일이다. 누가 옳고 그르다 따질 것이 아니다. 대국적으로 미래를 보고 나아가야지 과거 가지고 멈칫멈칫 했다가는 우리에게 이로울 게 없다.”

- 신 동양평화론도 같은 의미인가.

“비슷하다. 그런 의미도 포함돼 있다. 우리가 작은 나라지만 인도적·도덕적·논리적 합리성을 갖추고 주변 나라와 함께 나가는 것을 말한다. 강대국이 생각할 때 ‘너희가 무슨 아시아의 리더냐’라고 할 수 있지만, 정당성이 있으면 정면으로 거부하지 못한다. 다른 나라들은 유엔 분담금을 늦게 내거나 안 내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할당액보다 조금 더 내고 지정 기탁을 하는 것이다. 에티오피아가 한국전쟁 때 도움을 준 나라니 그 나라 빈민을 위해 써달라고 하면 된다. 한국 사람은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갚는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강대국이 이런 행동을 비난하지 못할 것이고 제3세계에서 인기도 얻을 수 있다.”

- 국문학도를 꿈꾼 이유는 무엇인지.

“1‧4후퇴 때 피난을 갔다. 피난 간 곳의 먼 친척 집에서 책을 빌려 아버지가 한문을 가르쳐주셨다. 명심보감, 논어, 맹자를 베껴서 가르쳐주셨는데 제도교육 속에서 배운 것과 전혀 달랐다. 2500년 전의 맹자를 읽으며 맹자의 지혜에 놀라서 열심히 읽은 기억이 있다. 아버지 교육 방식이 옛날 서당식이라 책을 다 외웠다. 육십갑자, 삼강오륜, 전통문화에 대해 10개월 동안 다 읽었다. 서울 수복해서 학교에 다시 가니 나만큼 한문 읽은 사람이 없더라. 국어 선생님도 그렇게 논어, 맹자를 읽은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국어, 한문을 잘할 수 있었다.”

- 국토 분단된 지 65년, 남북 간 긴장 관계가 여전한데 민족의 동질성 회복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지.

▲ 홍일식 전 총장

“북한 핵은 겁낼 문제가 아니다. 핵전쟁 날 것처럼 호들갑 떨 필요 없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분단된 국가가 우리뿐만이 아니다. 중국도 국공 내전을 했다. 장제스가 마오쩌둥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병력·화력·재력, 지도자의 국제적 위상에서 훨씬 우위였다. 그런데 3~4년 만에 마오쩌둥 천하가 됐다. 그 이유가 바로 도덕성 때문이다. 

장제스 군대는 분탕질, 겁탈을 자행해 주민들이 산속으로 도망갔다. 그런데 마오쩌둥 군대가 들어오면 주민들이 환영했다. 마을 청소도 해주고 군량을 약탈하는 것이 아니라 나눠 달라고 요청한 뒤 차용증을 시가의 몇 배를 쳐서 써줬다. 정부가 들어서면 갚겠다는 것이다. 

민심이 천심이라고 군복도 제대로 못 입었던 마오쩌둥이 불과 3년 만에 전세를 역전했다. 

독일 통일도 마찬가지다. 서독의 재력이 큰 역할을 하긴 했지만, 동독도 사회주의 중에서는 앞서갔다. 왜 통일될 때 총소리 한 번 나지 않고 통일됐느냐를 보니 동독은 흡수 통일이 돼도 서독이 자신을 죽이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도 남북 간의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해 북쪽이 알게 하면 핵보다 더한 걸 해도 두려울 게 없다.”

- 한국 정치 현실이 어떻다고 생각하는지.

“철들지 않은 사춘기 소년소녀들처럼 아주 위태위태하기 그지없다. 침몰하는 배 갑판에서 노름해서 돈 땄다고 좋아하는 것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결국 배가 가라앉아 버리면 끝이다. 한마디로 국가철학, 역사의식이 빈곤한 거다. 궁극적으로 문화의식의 빈곤이다.”

- 우리 국가 의식과 철학은 무엇으로 해야 하나.

“순국선열을 우러러 모셔야 한다. 외국에 놀러 가는 사람은 많은데 순국선열을 기리는 사람은 적다. 기성세대가 잘 가르치지 못한 탓이다. 1965년 한일국교가 정상화돼서 여권을 갖고 일본에 갔다. 대한민국 여권을 당당하게 출입국관리국에 내놓는데 관리국 직원이 일본말로 물어보더라. 초등학교 4학년 때 해방이 됐으니 일본말을 어느 정도 할 줄 안다. 그래도 자존심 때문에 서툰 영어로 대답했다. 여권을 지니고 간다는 게 그렇게 자랑스럽고 흐뭇했다. 지금은 그 고마움을 모른다. 식민주의 시대를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 정치인의 자질 향상 방법은 없나.

“인성 교육을 해야 한다. 총장 재임 기간에 ‘바른 교육 큰 사람 만들기’ 운동으로 도덕 교육을 철저히 했다. 취임하자마자 명심보감을 개편해서 어느 학과를 전공하든 2학점을 필수로 듣게 했다. 효문화 효사상을 고려대 목표로 선언했었다.”

- 대학 진학률이 70%가 넘는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할까.

“극단적인 이기주의의 결과다. ‘어찌 됐든 1등만 해라, 남들보다 앞서가라’고만 하지 어떻게 남하고 같이 어울려 사느냐는 고민을 안 한다. 살기 각박해서 극단적 이기심이 나은 현상이다. 이대로는 오래 못 간다. 교육 과열이 심하다. 물극필반(物極必反), 모든 사물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되돌아온다는 주역의 말처럼 한계상황까지 가면 다시 되돌아올 때가 머지않다. 그때까지 고통을 참는 수밖에 없다.”

- 총장 시절 어떻게 보냈는지.

“나는 인문학을 전공했고 법, 경제에는 문외한이다. 그래도 살아가는 방법과 도리는 아니까 그것에 어긋나지 않게 할 테니 현행법상 어긋나는 게 있으면 지적을 해서 보완해주면 좋겠다고 교수들에게 말했다. 재임 기간에 공사 입찰 등 재정 문제를 부총장과 처장들에게 위임했다. 대신 감사권, 인사권을 일 년에 두 번 철저히 행사하겠다고 말했다. 또 임기 중에 총장이 공금에 십원 한 장 손대지 않겠다고 했다. 세 가지를 아주 철저히 지켰고 총장직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 사상적 문제의 대안은 있나.

“결국은 초탈하는 거 아닌가? 혼돈의 시대다. 많은 미래 학자가 미래를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개탄하고 있다. 무책임하지만 정직한 말이다. 앞으로 인간은 모두 고독하고 외로워하는 시대가 될 거다. 농경사회는 배고팠고 산업사회는 힘들어서 못 살겠다고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정보화사회는 교통, 통신의 발달로 바빠서 못 살겠다고 한다. 이 시대도 이제 지나가서 결국 문화영토 시대가 될 것이다. 고도의 지식정보사회가 되면 외로워서 못 사는 시대가 된다. 사람이 없어서 외로운 게 아니라 군중 속의 고독이다. 전부 자기만 생각한다. 집단 고독 증후군을 현대인이 어떻게 극복하고 있느냐면 반려동물을 키운다. 사람을 못 믿으니 동물과 더불어 사는 것이다. 이 시대에 인간의 집단 고독 증후군을 치유하는 백신이 안 나왔다. 기성의 종교·철학·사상·이념이 유통기한 있는 식품 같아서 인류의 정신질환을 치료하지 못하게 됐다. 이걸 치유할 수 있는 집단과 개인이 21세기 인류 문명의 지도자가 될 것이다.”

- 인생을 돌아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지.

“허망하다. 평생을 도덕적 정당성을 세워야겠다고 목청껏 외치고 담론과 강연 등 다양한 방법으로 다 해봤는데 내가 주장한 방향과 거꾸로 갔다. 인생은 평생 현실에 도전하고 싸우지만 정작 하나도 바꾸지 못하고 간다는 걸 깨달았다. 자괴감이 들더라. 범인인 내가 옛 성인도 못한 걸 하려고 했다는 생각을 했다.”

- 앞으로 하실 일은 무엇인가.

“건강이 되는 한 자기 정리를 잘해서 뒷사람에게 물려주는 것이다. 걱정은 책이다. 서고가 꽤 큰데 옛 서적이 많이 있다. 그나마도 한국전쟁 중에 다 없어지고 남은 게 지금 가진 것이다. 그 책들을 어떻게 하나 고민이다.”

 

▲ (왼쪽부터)이인원 회장과 홍일식 전 고려대 총장이 원광디지털대 스튜디오에서 대담을 나누고 있다.

 

■ 홍일식 전 고려대 총장은 …

1959년 고려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같은 대학원에서 1964년과 1980년 석·박사를 했다. 1997년 연세대 명예 철학박사를 했다. 1977년부터 2001년까지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1994부터 1998년 동안 고려대 총장을 지냈다. 1999년부터 현재까지 (사)세계 孝 문화본부세계孝문화본부 총재다. 2003년부터 지금까지 우당 이회영선생기념사업회 회장과 2003년 (사)한국인문사회연구원 이사장이다. 저서로 『한국인에게 무엇이 있는가』 , 『나의 조국 대한민국』, 『문화 대국으로 가는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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