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이래라 저래라 해선 안돼"

[한국대학신문 이다희 기자] '살며 생각하며'는 한국대학신문이 우리나라 사회 발전에 큰 역할을 한 분들의 살아온 발자취를 살펴보고 현재 우리 사회를 진단해보는 프로그램이다.

이인원 전 KBS 심야토론 MC이자 현 한국대학신문 회장이 진행하는 '살며 생각하며'는 우리나라 각계 원로를 만나 그들의 살아온 인생을 조명하고 우리 사회 문제와 미래에 관해 얘기한다. 자서전과 역사 기록물의 성격을 갖는 대담 프로그램으로서 유튜브(http://www.youtube.com)와 한국대학신문 홈페이지(http://news.unn.net/)에서 볼 수 있다.

‘살며 생각하며’ 대담의 세 번째 주인공은 김동길 박사다. △역사학자 △문필가 △사회정치철학자 △정치평론가로 여러 방면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김동길 박사에게 역사 한복판에서 살아온 얘기와 현시대 우리 사회의 모습을 들어봤다.

- 인생에서 사랑이 제일 중요하다고 했는데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삶에서 제일 소중한 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인생에서 돈이 소중하다, 명예가 필요하다. 다 이해는 간다. 그러나 반드시 인생의 주제는 사랑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 철학적으로 아가페 사랑, 에로스 사랑이 있는데 어떤 사랑을 말하는 것인가.

“다 합해서다. 인류의 역사가 굴러가려면 남자와 여자의 사랑도 있어야 한다. 아름답게 사랑이 이뤄져야 사회가 좀 더 아름다워진다. 또 인간이기 때문에 많은 사랑이 필요하다. 어려운 고비에서도 사랑만 있으면 산다. 그 확신이 있어서 내가 사랑의 전도사다. 그것을 강조하면서 한평생을 살았다. 인생을 오래 살아서 나이가 90세가 됐으니 할 수 있는 얘기다. 인생의 주제는 사랑이다. 그 얘기를 할 수 있는 나이는 됐다고 생각한다.”

▲ 이인원 회장

 - 성경에 보니까 사랑은 인내이고 친절이고 시기하지 않는다고 나오는데.

“고린도 전서 13장에 있는 말이다. 사랑이라는 건 주는 거지 받는 걸 기대하는 건 사랑이 아니다. 남녀의 사랑도 주려고 하지 받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또 역사를 공부했는데 인류 역사의 주제는 자유다. 인간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건 사랑이고, 역사의 뜻은 어디에 있는가? 자유를 찾는 데 있다. 이렇게 명확하게 해놓고 산다.”

 - 자유의 파수꾼을 매일 쓰는 것으로 안다.

“새벽에 쓴다.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4시쯤 일어나서 5시쯤 쓰기 시작해 6시에는 다 쓴다. 주제는 매일 달라진다. 수가 많지는 않지만 매일 보는 사람들이 있다. 한국뿐만 아니라 외국에도 있어서 보람을 느낀다. 앞으로 쓸 수 있는 날까지는 매일 쓸 거다.”

- 글에서 자주 쓰는 생사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누구나가 다 생각하는 문제다. 삶이 있어서 죽음이 있고 또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이 소중하다. 삶과 죽음을 갈라놓고 생각할 수는 없다. 삶 속에 죽음이 있는 거다. 인생의 긴 과정이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 되는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죽음을 두려워하고 끝이라 생각하지 않게 된다. 요새 내가 만든 말이 있다. ‘이 세상에 태어나 고생만 하다 봄, 여름, 가을이 덧없이 가고 눈 내리는 어느 날 늙고 병들어 왔던 곳 찾아서 되돌아가네.’ 그게 인생이다.”

- 칼라일의 시 중에도 좋아하는 구절이 있지 않나.

“칼라일도 그런 제목으로 시를 썼다. ‘앞으로는 새날이 밝아오나 그대 생각하여라 이 하루를 헛되이 보낼 것인가. 영원으로부터 새날은 탄생해 밤이 되면 다시 영원으로 돌아가느니 보라 푸르른 새날이 밝아오느라 그대 이 하루를 헛되이 보낼 것인가?’”

- 100세 시대 축복인가 고난인가.

“우리 집안에는 80세를 산 사람도 없이 다 70대까지 살았다. 나 하나만 90세까지 왔다. 90세까지 살면서 무엇을 느꼈는가 하면 100세 시대, 120세 시대는 모르고 하는 말이다. 몸이 예전 같지가 않아서 90세까지 살기도 힘들다. 한 30년쯤 전에 이인원 선생과 KBS 방송했던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건강이 말이 아니다. 옛날에는 층계도 몇 개씩 뛰어 올라가고 뛰어 내려오고 그랬던 것이 나이가 들면 다 불가능해진다. 결국 노인으로 사는 건 힘들다. 또 100세 넘은 분들이 더러 계시지만 102세인 김병기 화백처럼 특별한 분들 몇 분 빼고는 다 집에 누워 계신다. 그런 걸 생각하면 100세가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니지 않나. 나는 후배들에게 ‘90세까지 살기도 힘든데 100세 너무 가혹하지 않느냐’라고 말한다. 사람의 삶이 영원과 이어진다는 그런 확신이 없으면 인생의 노후가 비참해진다.”

- 철학이 있는 인생이란 어떤 인생인가.

“철학이 있다는 건 가치관이 있다는 말이다. 가치관이라는 건 쉬운 말로 하면 무엇이 제일 소중하고 그다음이 무엇인지 또 그다음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그것을 갖고 있어야 철학이 결국 도덕의 바탕이 된다. 도덕이 무너지면 인간 사회의 행복이 무너진다. 부부 사이, 사제 사이 이런 관계가 흔들리면 철학이 없는 것과도 같다. 이 시대의 문제는 철학이 없는 것이다. 정치가도 철학 없이 정치를 한다. 편리한 것, 내가 성공하는 것만 생각한다. 이게 철학적으로 해서 되는 일인지 논리, 윤리에 맞는지 생각을 안 해서 시대가 몹시 어렵다.”

- 옳음과 좋음 중에 어떤 쪽을 택하겠나.

“CNN에 아만푸어라는 분쟁 지역에서 활약하는 언론인이 있다. 그가 자기는 어떤 일을 보도할 때 어느 것이 쓸모 있느냐를 생각하지 않고 어느 것이 더 진리·진실에 가까운가를 생각한다고 말했다. 참 좋은 말 같다. 둘 다 있어야 한다. 옳기만 하고 선량하지 못하면 괴롭고 옳은 건 없이 좋기만 해도 오래 못 간다. 둘이 쌍벽을 이뤄 서로 보완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 18세에 해방됐는데 18년 동안 북한에서 어떻게 생활했나.

“18세 때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해방됐다. 그 후 한 1~2년 북에서 살았다. 맹산 산골에서 태어나서 소학교를 다녔다.”

- 그때 공부 잘하지 않았나.

“아니다. 보통 정도 했다. 좋은 학교에 들어간 것은 맞다. 5년제였는데 일제가 말기에 사람이 필요하니까 빨리 졸업시켜서 4년 만에 졸업했고 초등학교 교사가 됐다.”

- 초등학교 선생님일 때 어떤 것을 가르쳤나.

“초등학교 과목을 다 가르쳤다. 기억에 남는 학생은 내가 3학년 담임을 했을 때 시골에 나하고 같은 나이의 학생이 있었다. 18세였고 잘생겼었다. 그런 시대였다. 그때 일본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한다는 일본 천황의 발표를 이 귀로 들었다. 그 후 평양에 집이 있어서 평양 상소학교에 취직했다가 슬그머니 월남했다.”

▲ 김동길 박사

-가족은.

“다는 못 오고 어머니를 모시고 월남했다. 원산으로 가서 원산에서 차를 타고 철원까지 가서 거기서부터는 걸어서 논두렁길을 따라 달빛도 없는 어두운 38선을 넘었다. 그때 이후로 북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 금강산에도 안 갔나.

“안 갔다. 고향은 저만치 있는데 금강산에 가면 뭐 하나. 월남 후 연희대학에 들어갔다. 연희대학 근처에서 1947년부터 살았는데 지금까지 그 집에 산다. 집은 단층을 2층으로 올렸지만 그것도 50년 됐다. 이사를 한 번도 안 갔다.”

- 어렸을 때 어떤 생활을 했나.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자랐다. 교회에 다녔기 때문에 다른 애들처럼 술과 담배를 안 배웠다. 그 당시 교회에 다니는 애들은 술과 담배를 하면 안 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좋은 것 같다. 지금은 다 무너져서 교회 다녀도 술, 담배 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거 없이 순수하게 자랐다.”

- 언제 인생을 깨닫게 됐나.

“공자님 말씀대로 15세에 지학(志學) 배움에 뜻을 두었고 30세에 이립(而立) 나의 입장이 뚜렷한 사람이 됐고 40세에 불혹(不惑) 유혹에 빠지는 일이 없는 사람이 됐고 50세에 지천명(知天命) 하늘의 뜻을 아는 사람이 됐고 60세에 이순(耳順)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도 아는 사람이 됐다. 그 순서대로다. 공자님이 우리 앞에 다 해놨다. 30세에 내 의견은 뚜렷해졌다. 연세대 전임강사 된 게 1955년 28세 때다. 연대 김병수 전 총장이 첫해 가르친 학생이다. 첫해 가르친 학생들 중에는 의과 애들도 있었다. 그 당시에는 다 같이 모집해서 이듬해에 원하는 학과로 갔다. 연세대에 다니면서 최현배 선생 등 어른들을 가까이 모실 수 있었다. 다 한 시대의 대단한 분들 아닌가.”

- 영시 많이 외우고 있는데 몇 수를 외우고 있나.

“세어 보지는 않았다. 해방된 후 다 영어를 배운다고 해서 영문과에 들어갔다. 교수님이 좋은 영시니까 암송하라고 하면 다른 애들은 안 외우는데 나는 순진하니까 다 외웠다. 그때 외운 거다. 시조를 백 수 가까이 외웠다. 어려서 쉽게 암기한 것이다.”

- 윤선도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좋아한다. 왜 좋아하느냐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쉬이 지고 풀은 어이하여 푸르는 듯 누르나니 아마도 변치 아닐손 바위뿐인가 하노라’ 나이를 먹으니 가슴에 와 닿는다.”

- 어떤 소양을 가진 정치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보는가.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정치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능력 있는 사람의 조건은 정직이다.거짓말하는 것이 일시적으로는 효과가 있어도 오래 보면 실패한다. 나는 그래서 정치 하는 사람 중에 제일 존경하는 인물이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다. 정직하게 해도 위대한 정치 지도자가 될 수 있다.“

- 한국 교육제도 어떻게 보는가.

“지금 이 교육제도는 잘못됐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가고 싶은 대학에 지망해 그 학교에서 시험 보고 그 학교 절차에 따랐다. 그런데 지금은 성적에 따라서 대학이 나뉜다. 고3 조카를 보니 너무 고생한다. 외고에 다니는 3년 동안 편한 날이 없더라. 매일 늦게 오고 자기 생활이 전혀 없다. 외고 졸업 후 대학에 들어갔는데 공부를 그때처럼 안 한다. 넌더리가 나는 모양이다. 대학은 총장이 다 맡아서 해야 한다. 입학·퇴학·졸업도 총장 권한이다. 법이 그렇게 돼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이런 게 너무 많다. 또 학교 등급을 매기면 안 된다. 고3 담임이 ‘너 이 성적이면 이 대학을 가지 왜 이 대학을 가?’ 이런 식으로 말을 한다. 이게 말이 되나? 이건 교육이 아니다. 고등학교 담임선생님이 자기 학교 순위만 생각한다. 무슨 대학에 많이 들어갔다고 해야 학교 순위가 오른다. 입학시험은 총장이 맡아서 할 권한이 있다. 옛날처럼 대학이 개별적으로 시험을 봐서 학생들이 힘들지 않게 해야 한다. 시험도 1차, 2차로 볼 수 있게 해줘야지 지금처럼 하면 젊은 사람들만 고생한다.”

▲ (왼쪽부터)이인원 회장과 김동길 박사가 원광디지털대 스튜디오에서 대담을 나누고 있다.

  김동길 박사는…

1951년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71년 미국 보스턴대에서 철학박사를 했다. 1955년부터 연세대에서 강의를 시작해 현재 연세대 사학과 명예교수로 있다. 1992년 통일국민당(국민당) 최고위원과 제14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1993년 국민당 대표최고위원, 1994년 신민당 대표최고위원을 했다. 현재 한민족원로회 공동의장이다. 저서로 《MB…이게뭡니까》《'젊은이여 어디로 가고 있는가》등 80여권이 있다. 

<정리=이다희 기자 / 사진=조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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