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구 (본지 논설위원, 한국과학창의재단 연구위원)

새해 벽두에 대선 잠룡 중 한 명이었던 박원순 서울시장은 파격적 공약을 발표했다. 교육 불평등 해소를 위해 ‘서울대를 폐지해 시설과 인력을 지방 국립대로 보내고 전국 광역시도별로 국공립대 통합 캠퍼스를 조성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파리 국립대가 모델이며 프랑스는 오래전 파리대를 해산하고 전국 지방대를 흡수·통합해 1대학, 2대학 등 명칭을 부여하고 있다고 부연 설명했다. 대선후보 경선 포기로 박 시장의 주장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문재인 정부 출범 후 ‘한국대(가칭) 출범 프로젝트’로 국립대 통합이 다시 이슈로 떠올랐다. 한국 대학교육 병폐 중 하나인 대학 서열화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고 있고, 새 정부 100대 국정과제에 ‘거점국립대 집중 육성’이 포함돼 있어 실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통합 추진 측은 최종 목표가 공동학위제고 파리의 통합 국립대처럼 통합 네트워크 소속 학생이 똑같은 졸업장을 받게 하겠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파리 7대학 출신으로 1990년대에 프랑스에서 공부했다. 필자의 유학 시절에는 파리 1대학부터 13대학까지 있었고 각기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보르도 1대학, 2대학 식으로 숫자가 붙는 건 국립대이며 이는 일제강점기 때 제1고보, 제2고보처럼 행정편의상 붙인 이름일 뿐이다. 각각의 파리대는 개설학과, 학사관리, 졸업증 등이 모두 달랐고 각각 고유의 이름도 갖고 있었다. 가령 파리 1대학은 팡테옹-소르본, 파리 4대학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소르본이다.

파리대학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중 하나다. 12세기 중엽 설립돼 처음에는 교수와 학생의 길드(조합) 형태였는데 13세기에 프랑스 국왕과 교황에게 칙서로 인정받았다. 신학, 철학으로 유명한 소르본 대학이 파리대학의 모체다. 프랑스 혁명 시기 폐교됐다가 1896년 재설립되는 등 부침을 겪다가 1971년 13개 독립 대학으로 분리된다. 21세기 들어 파리대 분리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2005년 고등교육기관연합체 ‘파리 위니베르시타스’가 창설돼 연합체로 운영되다가 2010년 해체돼 다시 몇 개 그룹으로 분리된다.

현재 7개 대학연합그룹이 있다. 가령 파리 4대학, 6대학, INSEAD, 국립과학연구소, 국립자연사박물관 등 10개 기관이 모여 ‘소르본 대학연합’이 됐고, 파리 8대학, 10대학은 연합해 파리 뤼미에르 대학을 만들었으며, 파리 12대학과 마른 라 발레 대학은 파리-에스트 대학으로 합종연횡을 이룬다. 이들 대학연합은 원래 대학은 그대로 두고 그 위에 우산을 씌운 연합체로 지방정부가 연합한 연방정부 같은 모양새다. 복지시설, 도서관 등을 공동 이용하고 박사과정, 연구과제도 공동 운영하지만 공동학위제 기반의 완전통합체 수준은 아니다. 연합체의 당초 목적은 세계대학평가에서 상위 서열에 오르는 것과 정부지원을 받기 위한 것이었으며 파리지역 대학연합에 지방대까지 참여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모델로 이야기하는 통합 파리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파리의 대학연합이 프랑스와 여건이 전혀 다른 한국의 대학 통합 모델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파리대학연합의 목적이 국제적으로 대학 서열을 높이려 했던 점인 것도 생각해봐야 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국립대 통합이 우리나라 대학교육의 근본적 문제점을 해결해 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지방 국립대를 같은 이름으로 통합하고 공동학위제를 운영한다고 대학 서열제가 없어질지도 의문이지만 지금 대학의 문제가 비단 그뿐이겠는가. 사회는 4차 산업혁명 격변을 겪는데 대학은 산업화 시대 방식으로 운영되는 문제, 대학이 외부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공급자 중심으로 운영되는 문제, 대학이 상상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곳이 아니라 취업 준비 학원으로 전락한 문제, 중국 대학은 창업 요람이 되고 있는데 한국 대학에서는 창업 미풍조차 불고 있지 않은 현실 등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한국대로 이름 바꾸고 제도를 바꾼다고 대학 경쟁력이 높아지지는 않는다. 포장과 제도만 바꾸는 대학개혁은 포퓰리즘에 불과하다. 대학의 질적 개혁과 근본적 경쟁력 강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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