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영 사태’ 이후 과학계 설왕설래

▲ 박기영 과기혁신본부장이 사퇴하면서 과학계가 인선을 두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박 본부장이 10일 정책간담회에서 손을 모으고 생각에 잠겨있다.(사진=김정현 기자)

정치력, 전문성보다는 과학기술계로부터의 신뢰감이 최우선 조건
“인사로 그간의 문제 일시 해결 힘들어”… 운신 폭 좁아진 현실 고려해야

[한국대학신문 김정현 기자] 박기영 순천대 교수(생명과학)가 논란 끝에 과학기술혁신본부장직을 사퇴하자 과학계는 새 본부장 인선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과학계 일각에선 본부장으로 단순히 R&D 예산을 총괄하는 것을 넘어서 국정운영에 참여하는 과학계 대표 선수를 뽑아야 한다는 요구가 여전하다. 기획재정부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예산권을 가져오고, 연구실 현장과 괴리된 정책을 개선하는 역할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부장 인선만으로 10년간 쌓인 문제가 일거에 해소되기는 어렵다며 추진력보다 신뢰와 소통을 우선시하는 인사를 지명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 과학계는 왜 과기혁신본부장 인선에 주목하나= 과학계가 과학기술혁신본부에 갖는 기대감은 ‘메시아’에 가깝다. 현재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의 차관급 기구지만, 참여정부 시기엔 장관급 기구로서 R&D는 물론 과학기술정책 전반을 총괄, 조정했다. 당시 과기혁신본부는 R&D 예산에 대한 조정, 배분, 성과평가뿐만 아니라 인력양성과 산업, 지역혁신과 같은 교육, 경제 정책에도 관여했다.

정권이 바뀌면서 과기혁신본부는 해체되고, 주무부처인 과학기술부도 부총리 지위를 잃고 교육부와 합쳐졌다. 과학기술 부처는 전 정권에서 미래창조과학부로 분리되긴 했으나 여전히 정보통신(ICT)과 한 틀에 묶여 있는 상황이다.

이 과정에서 거시적으로는 과학기술 정책방향을 제시하고, 정책과제를 발굴하며 미시적으로 R&D 예산을 총괄ㆍ조정하는 과학기술혁신정책(STP) 생태계가 타격을 입었다. 예산권이 기재부에 다시 종속되면서 R&D 관리에서 관료주의가 심화되고, 그 결과 연구 현장과 괴리된 연구비 관리 정책이 등장하게 됐다는 것이 과학계의 지적이다. 작년에는 호원경 서울대 교수(의학) 등 과학계 인사 494명이 전체 16%에 불과한 자유공모 기초연구비 비중을 정상화할 것을 청원하기도 했다.

과학계가 참여정부의 정책 기조를 계승하는 문재인정부에 대한 기대가 높았던 건 이 때문이다. 대선 시기부터 연구현장을 옥죄어 왔던 정책을 해소하고, 과학기술 정책의 주도권을 다시 되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여기에 ‘촛불 혁명’으로 적폐를 청산해야 한다는 사회 분위기와 맞물리면서, ‘스타 과학자’로 대표되는 소수 엘리트가 과실을 독점하고 경제성장 위주의 거대과학에 편중된 정책 기조를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도 힘을 얻었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이 ICT 산업계 출신인 유영민 현 장관을 지명하고, 4차 산업혁명을 일자리 창출의 기치로 내걸면서 ICT에 힘을 싣자 불안감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차관급이지만 국무회의에 배석하는 본부장이 과학계 대표 선수의 지위와 적폐 청산의 기대를 떠안게 된 것이다.

■ 정치력 갖춘 과학계 인사? 예산전문가? 중요한 것은 신뢰= 일각에선 본부장의 필수 조건으로 ‘정치력’과 전문성을 거론하기도 한다. R&D 예산배분권과 국정운영에 참여하는 과기혁신본부가 과학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때로는 기재부, 타 유관부처와의 힘겨루기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과학계 일부에서 박기영 교수의 본부장 임명을 두둔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박 교수는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정보과학기술비서관을 맡았고, 순천지역에서 오랜 기간 시민운동을 해왔다. 과학계 원로들 사이에 박 교수가 현 정부에서도 정치적 배경이 든든할 것으로 보고 과학계를 위해 권력을 행사해 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다는 후문이다.

한 과학계 인사는 “과학계에서 일부 인사들이 박기영 교수를 두둔한 것도 그의 카리스마적인 정치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다”고 밝혔다.

예산 전문성을 첫손가락에 꼽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전문성이 없으면서 수혜자인 과학기술인이 직을 맡으면 신뢰감이 떨어진다는 소위 ‘선수심판론’이다. 정선양 건국대 교수(기술경영)는 지난 11일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토론회에서 “혁신본부의 권한은 최고의 전문성에 의해 논리적 타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다. 과학기술 정책 전문가와 경제ㆍ경영 분야 전문가가 본부를 운영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박 교수가 ‘황우석 사건’에 연루된 전력으로 이미 과학계에서 신뢰를 잃었음을 간과한 것이다. 과학계로부터 먼저 반발이 일어났으며 낙마로 이어진 원인이 됐다. 연구윤리 흠결은 과학계에서 중대한 적폐로 지적돼 왔으며, ‘황우석 사건’은 그 상징과도 같기 때문이다.

박기범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연구위원은 “수많은 이해 관계자들의 엇갈리는 이해를 조정하는 역할을 맡기 위해서는 적어도 과학기술자들의 신뢰가 있어야 한다”며 “(황우석 사건 이후) 과학계에서 정부의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있던 가운데 그 핵심 당사자가 요직에 임명되면서 반대 목소리가 일거에 나오게 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현 상황에서 과학계의 신뢰를 얻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부활한 과기혁신본부의 이해와 국가 R&D 정책에 대한 경험과 통찰은 필수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과학계에서 R&D 시스템 문제를 지적하는 데 대한 개혁 의지와 안목은 있는지, 행정체계가 작동하는 원리와 속성을 얼마나 이해하는지, 국회와 정부 속에서 위상과 역할을 활용할 역량은 어느 정도인지도 평가 요소로 꼽았다. 이 안에는 연구윤리와 같은 도덕성 요소도 포함돼 있음은 물론이다.

■ ‘구세주‧메시아’적 접근은 위험, 장기적 관점으로 바라봐야= 과학기술정책 전문가들은 일부 언론에서 쓰는 과기혁신본부장이 20조원을 ‘주무른다’는 표현처럼 본부장이 구세주로 강림할 것이라는 생각은 비현실적이며 되레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과기혁신본부가 범부처 R&D조정과 예산배분권, 예비타당성 조사의 권한과 기능을 맡게 되는 것은 사실이나 단기간에 대규모 수준의 예산 조정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당분간은 기존 R&D 예산의 합리성과 효율성을 높이고, 신규 예산의 전략성을 확보하는 데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홍성주 STEPI 연구위원은 작년 R&D 예산이 나라 살림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94%에 불과하다는 점을 들며 “신규 예산사업은 예산 자체가 증가하거나 기존 사업이 일몰돼 예산이 확보될 경우에 가능하다. 과기혁신본부가 실제 예산 정책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기존 사업에 대한 미시적 조정과 신규 예산 사용의 정당화 정도”라고 지적했다.

혁신본부가 참여정부에서는 부총리급 부처 소속이었지만 현 정부에서는 장관급 산하 차관급 직제로 축소, 사실상 운신의 폭이 좁아졌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홍 위원은 “과학계가 관료주의에 밀리고 있다 여긴다면 그 잃어버린 주도권은 과학계 스스로 찾아야 한다. ‘촛불혁명’의 정신을 반영하는 측면에서도 본부장 한 명이 이를 수행한다고 여기는 것은 과도하다”고 말했다. 과학기술 외에도 각 분야에서의 개혁은 아직 시작 단계이며, 갈망하는 바를 이루고자 한다면 이는 과학계 모두가 장기적 관점에서 노력해야 할 과제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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