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동안 발전시켜 온 원자력 기술 지속시켜 나가야…

[한국대학신문 이다희 기자] '살며 생각하며'는 한국대학신문이 우리나라 사회 발전에 큰 역할을 한 분들의 살아온 발자취를 살펴보고 현재 우리 사회를 진단해보는 프로그램이다.

이인원 전 KBS 심야토론 MC이자 현 한국대학신문 회장이 진행하는 '살며 생각하며'는 우리나라 각계 원로를 만나 그들의 살아온 인생을 조명하고 우리 사회 문제와 미래에 관해 얘기한다. 자서전과 역사 기록물의 성격을 갖는 대담 프로그램으로서 유튜브(http://www.youtube.com)와 한국대학신문 홈페이지(http://news.unn.net/)에서 볼 수 있다.

‘살며 생각하며’ 대담의 네 번째 주인공은 정근모 박사다. 지금 우리 사회는 원자력 발전소 유지측과 폐기측 두 논리가 대립하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공론화위원회가 구성됐다. 이와 관련해 우리나라 원자력 발전과 운영에 큰 책임을 지고 있는 정근모 박사와 함께 살아온 생애와 오늘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들어봤다.

- 원자력 발전소를 폐기하겠다는 입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내가 국제적인 일을 많이 해서 해외에 친구들이 많다. 특히 과학기술계, 원자력계에 많은데 그 지인들이 나에게 이메일로 미국이 TMI(Three Mile Island) 사고가 났을 때도 두뇌자원인 원자력을 통해 에너지 자립한다며 오히려 확대 계획을 내놓고, 체르노빌 사고가 났을 때도 다른 유럽 나라들이 흔들릴 때 우리는 기술자립을 하겠다고 나섰던 한국이 갑자기 웬일이냐고 물어본다.”

▲ 이인원 본지 회장(왼쪽)과 정근모 박사가 원광디지털대 스튜디오에서 대담하고 있다.

- 신고리 5, 6호기도 공정이 거의 30% 진행됐는데 공사를 중단한다는 게 이상하지 않나?

“이상하다기보다는 아마 정부에서 재고할 거라고 생각한다. 3조원에 가까운 매몰 비용이 드는데 정부에서도 스스로 이건 아니다라고 판단할 것이다.”

- 그렇게 되리라고 자신하나?

“모든 일은 결정하는 사람이 따로 있으니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나에게 물어보면 그렇게 말할 것이다. 신고리 3, 4, 5, 6호기는 가장 앞선 설계이자 가장 싸게 짓는 공정이다. 세계에서 가장 앞선 원자력 발전소를 해외에도 수출하지 않았나? 그런데 그것을 그냥 매몰한다면 거기에서 오는 영향이 그냥 경제적인 것 이상으로 우리나라 신뢰도까지 문제가 될 것이다.”

- 한국형 원자력은 어떤 것인가?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 이론 예측을 한 것이 1905년이다. 오토 한(Otto Hahn)과 리스 마이트너(Lise Meitner) 팀이 우라늄 분열 시 질량 손실이 있고 그때 엄청난 에너지가 나오는 걸 1930년대 말에 증명했다. 그때가 마침 2차세계대전 중이다. 이것이 히틀러 손에 들어갈까봐 과학자들이 굉장히 걱정했다. 아인슈타인이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절대 히틀러 손에 들어지 못하게 하라고 편지를 썼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쟁중이니까 엄청난 에너지에 관심이 많았다. 그것이 실제로 원자폭탄 개발로 이어졌고 또 2차 대전을 종식시켰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원자탄의 위력에 대해 알게 됐다. 그때 선진국에서 이런 새로운 에너지를 무기로서 파괴적으로 쓰면 안 된다는 여론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중 한 명이 미국의 원자폭탄을 개발한 로버트 오펜하이머(Robert Oppenheimer) 박사다. 그는 인류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무기는 더 이상 개발하지 않겠다면서 수소탄 개발에 손을 뗐다. 미국 국회의원은 냉전 중에 핵무기 개발에서 손을 떼겠다는 건 미국의 이익에 반하는 거 아니냐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래도 과학자, 지식인 중에서 파괴적인 핵무기를 중단하자는 사람이 몰렸다. 오펜하이머 박사는 그때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소장으로 와서 아인슈타인 박사와 함께 그곳에서 연구를 계속 하게 했다. 나는 1960년대 그를 직접 만났다. 53년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유엔에서 역사적인 연설을 했다. 평화를 위한 원자력을 하겠다. 그래서 잠수함에 쓰려고 개발한 가압 경수로로 원전을 건설했다. 평화로운 원자력 에너지를 증명하고 쓰기 시작한 것이 1950년대 중반이다. 가압 경수로가 원자력의 핵심 종류가 됐다. 그것 말고 일본 후쿠시마에서 사고를 낸 원자력 발전소는 비등 원자로(Boiling Water Reactor)다. 가압 경수로(PressurizedWater Reactor)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그 전에 개발된 원자로가 가스 냉각로라고 해서 가스 냉각로가 제 1세대고 초창기에 가압 경수로와 비등 경수로가 2세대다. 체르노빌 사고 난 후에 가스 냉각로를 다 폐기하고 비등 경수로 가압 경수로가 나왔다. 내가 미국 과학재단에 있을 때 우리나라에서 표준 원자력 발전소를 설계해야 한다고 논문을 썼다. 캐나다, 프랑스, 미국에서 사오지 말고 한국에서 가장 안전하고 앞선 원자로를 우리 손으로 설계해 개발하자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다 모르니까 자문을 많이 받아야겠지만 한국은 할 수 있다, 이런 내용을 쓰니 정부에서 보고 그러면 나와서 해보라고 그러더라. 그래서 내가 한국전력주식회사 사장으로 1982년에 귀국했다. 그리고 과학기술처에서 연구비를 따서 그 연구비로 한국형 표준 원자로를 개발하자 한 것이 일반적인 한국형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국민들이 꼭 알아야 될 것이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는 비등 경수로고 한국형은 가압 경수로다. 일본도 비등 경수로는 폐기 수순이고 오사카 중심으로 운전 가능한 가압 경수로가 있는데 한국형은 가장 앞선 가압 경수로다. 가압 경수로를 개발하는 미국회사 중에 우리가 잘 아는 웨스팅 하우스가 있고 컨버스전 엔지니어링이 있는데 우리는 웨스팅 하우스를 처음에 샀다. 고리 1, 2, 3, 4, 호기다. 그때 우리가 판단해보니 컨버스전 엔지니어링이 개발한 가압 경수로가 웨스팅 하우스보다 월등히 안전하고, 경제성에서도 좋아서 국제 입찰로 컨버스전 엔지니어링 회사가 개발한 가압 경수로를 채택했다. 근데 조건이 있었다. 웨스팅 하우스는 고리 1, 2호기 지으면서도 우리에게 기술을 안 가르쳐줘서 우리 표준 한국형을 하려면 완전한 기술을 이전 해달라고 했다. 컨버스전 엔지니어링 기술 책임자가 나에게 당신이 요구하는 걸 이해하겠다. 한국사람은 그만한 능력이 있다면서 우리 회사가 미국에서 더 짓지 않으면 이 기술 갖고 있어봤자 뭘 하겠나 한국가서 꽃을 피우는데 자기들이 전적으로 돕겠다고 말하더라. 그 조건 하에서 우리가 한국 표준 원자력 발전소를 개발했다. 그 회사는 미국 시장이 활발해지지 않아서 스위스 회사한테 팔리고 스위스 회사는 체르노빌 사고가 난 다음에 시장 발전이 안 되니 영국회사한테 팔았다. 영국회사는 아직도 1세대 원전을 돌리고 있으니 그것을 활용하지 않고 그냥 미국에다 팔아버렸다. 미국은 아무래도 웨스팅 하우스가 자기 고유모델을 주장하니까 더 개발을 안 하는데 그동안 우리는 그 기술을 완전히 소화하고 기술 자립을 했다.”

- 특허를 우리가 샀나?

“완전히 산 것은 아니고 개발을 많이 했으니까 기술료를 주는 조건이 있다. 완전히 다 주는 것이 아니라 UA에 가게 되면 UA에 어떠한 것은 미국에서 사들여 오는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100% 다 할 수 있으니까 그 기술을 우리가 샀으면 좋은데 주인이 웨스팅 하우스다. 그런데 웨스팅 하우스가 지금 굉장히 어렵다고 알고 있다. 보도 된 바에 따르면 웨스팅 하우스는 파산인데 내 생각에 그냥 갖고 있을지 우리한테 팔지 고민을 할 것이다. 나는 우리한테 팔라는 의견이다.”

- 한국 원자력 수준이 세계에서 경쟁자가 없을 정도로 발전한 것 같은데?

“1등이다. 왜냐하면 1세대는 다 끝났고 2세대는 수명이 다 돼 가고 3세대에서 선도주자가 바로 한국이다. 한국 것과 유럽 것이 있고 유럽은 EPR인데 가압 경수로가 경제성이 없다. UAE 입찰에서 우리나라한테 졌다. 그래서 핀란드에 가서 죽을 쑤고 있고 미국에 웨스팅 하우스는 AP1000을 중국에 팔았는데 AP1000에 관련된 중요한 부품을 한국에서 또 사간다. 우리 기술이 단순하게 하나의 원자력 발전소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인력이나 부품 업체, 관리하는 모든 것에 있어서 선두다.”

- 우리나라에 그렇게 인력이 있나?

“그동안 많이 훈련시키고 매년 지었지 않나. 쉬지 않고 해왔다. 미국에도 인력이 있었다. 그런데 짓지 않다보니 은퇴하게 됐다. 기술은 살아있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개선할 수 있는 걸 볼 수 있다.”

- 원전 포기하면 기술 인력도 문제인데?

“현장 인력도 있지만 인력을 양성하지 않나. 부품 조달부터 운전원, 기능원 전부다 생태계다. 우리나라는 생태계가 그동안 참 잘 자라왔다. 그런데 만약 이것을 그만두게 되면 생태계가 죽는다.”

- 원자력의 위험성으로 인해 폐기하는 곳이 많아지고 있는데?

“독일 사람들은 체르노빌 사고가 나서 방사능이 터져 나왔지 않나. 방사능이 터져서 구름이 오고 그러니까 놀란 것이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는 독일의 원자력 발전소와 다르다. 체르노빌은 가스 냉각로로 격납고도 없는 안전성 미비의 소련 것이다. 소련도 스스로 폐기 시켰다. 그때 놀라서 원전 반대 토의를 시작했지만 일부에서는 냉철하게 하자 이렇게 나왔다. 그런데 독일은 프랑스와 접경이고 스위스 넘으면 금방인데다 벨기에가 다 붙어있다. 전력 네트워크가 다 연결되어 있다. 전기를 살 수 있다. 동구권까지도 연결이 되니까 가스를 살 수도 있어서 우리나라와 여건이 다르다. 우리나라는 일본에 가서 사올 수도 없다. 우리 네트워크를 연결하자는 말에 찬성하지만 언제 할 거냐.”

- 원자력 발전소가 위험한가?

“체르노빌 원전은 안전성이 결여된 것이라 폐쇄됐다. 그러나 경수로 특히 가압 경수로는 그동안 오히려 전화위복으로 TMI사고가 있었고 후쿠시마까지 있어서 우리가 안전성에 대해 엄청나게 연구를 했다. 아마 어느 산업을 보더라도 안전공학이라는 걸 가장 발전시킨 것이 원자력 발전소일 것이다. 현대 과학기술의 핵심을 기술 개발뿐만 아니라 안전성에 대해서도 녹였다. 체르노빌 사고가 끝난 다음에 국제 원자력 기구에서 전세계 11명의 전문가를 모아서 원자력 안전 자문위원회를 만들었다. 그곳에서 내가 멤버로 8년 동안 일을 하면서 온갖 안전성 이슈를 다 검토했다. 필요한 것은 연구소가 다 연구하게 하고 안전공학에 최선을 다해서 설계에 반영시키는 일을 했다.”

- 일본같이 섬세한 나라도 해일 때문이기는 하지만 후쿠시마 사고를 당했는데

“일본의 후쿠시마 발전소 설계를 1960년에 했다. 신고리 3, 4, 5, 6호기는 2000년대에 설계됐다. 후쿠시마는 GE하고 일본의 회사가 같이 했지만 그때만 해도 원자력에 대해서 안전성 공학이 지금과는 상대가 안 됐다. 예를 들어 원자력 발전소는 운전원이 중요하지 않나. 운전원도 사람이니 실수를 할 수 있으니 설계할 때 실수를 절대 못하게 하면 된다. 봉을 빼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 못을 박아 놓는 것이다. 간단한 아이디어지만 인간의 실수를 완전히 봉쇄할 수 있다. 방사성 동위원소가 혹시나 생태계에 영향을 줄까 봐 7중 방어를 해놨다. 아마 현대 과학기술 산물인 인공지능, 원자력 등에서 가장 안전성을 존중하고 설계하는 건 원자력 발전일 것이다.” 

- 후쿠시마는 파도가 들어오는 걸 막는 벽이 없었던 것 아닌가?

“맞다. 바로 그 점이다. 후쿠시마 발전소 사고 원인은 이렇다. 근본적으로 지진이 후쿠시마에서 떨어진 태평양 바다 속에서 왔다. 그럼 해일이 생길 것 아닌가. 지진 때문에 부서진 게 아니라 해일이 왔는데 방파제가 낮아서 막지 못했다. 후쿠시마 지역에 과거 해일이 20m가량 높이로 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설마 그렇게 높은 해일이 올까라고 판단해 1960년대 설계하는 사람들이 5m로 만들었다. 후쿠시마보다도 더 지진 진원에 가까운 원자력 발전소가 오나가와다. 오나가와는 13m로 방파제를 만들어 놨더니 끄떡 없었다. 오히려 오나가와 원자력 발전소는 지진이 나서 사람들이 불안해하니까 원자력발전소로 피신하라고 시켰다.”

- 한국형 원자력 발전소를 염려할 필요 없다는 입장인가?

“지금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원자력 발전소가 우리나라다. 과학기술 작품을 볼 때 기술 경제성이라는 걸 본다. 기술성과 경제성을 합해서 취사선택을 하는 것인데 우리나라가 가장 경쟁력이 있다. 그래서 우리가 UAE에서 따낼 수 있었다.”

▲ 이인원 회장

- 전문가 없이 공론화위원회를 만든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전문성이 없는데 중요한 안전공학 내용을 모르고 결정하면 위험하다. 안전성 방법론 중 하나가 확률론적 방법론이다. 확률론적으로 안전성 검토를 할 줄 알아야 되는데 그것이 엄청난 전문 분야다. 사회가 어느 정도의 안전성을 해야 완벽하다고 생각하는지 고려하고 따질 수 있어야 한다. 원자력 발전소에는 시스템이 많다. 냉각 시스템, 펌프도 들어가 있고 핵연료 제어봉 시스템도 있다. 시스템을 보면 다 역사가 있다. 왜 이렇게 디자인했는지 공부에서 하는 거지 그냥 막 하는 건 아니다. 나라도 내가 원자력 전문가가 아니면 어렵다. 판단하지 않는 것은 공론화 위원들이 잘한 것이다.”

- 원자력 발전의 미래는 어떻게 보나?

“영국이 제1세대를 다 폐쇄한 다음에 제2세대를 하다가 제3세대로 넘어가야겠다고 판단해서 한국 원자력을 중요한 후보로 넣었다. 미국도 원자력 발전소 짓기를 오바마 대통령 때 다시 시작하지 않았나. 지으려고 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은퇴하고 많은 공장을 새로 지으려니까 보통일이 아닌 거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원자력 발전소 짓는데 있어서 생태계가 활발히 살아있는 곳을 해야겠다 생각해서 한국에 관심을 갖는다. 아전인수격으로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 60년동안 우리가 땀 흘리면서 만들어 놓은 한국의 원자력 생태계로 지금 이익을 많이 낼 수도 있는데 왜 우리 스스로가 발을 빼려고 하는지 안타깝기 짝이 없다.”

- 보도를 보니 중국이 우리나라쪽으로 원자력 발전소를 53개나 만들었는데 그게 더 위험하다는 얘기가 나온다.

“편서풍이 불기 때문이다. 중국 원자력 발전소도 우리와 경쟁할만큼 발전했다. 중국의 원자력 발전 기술 수준 상당히 높다. 다만 너무 한꺼번에 많이 지으니까 혹시나 실수 할까봐 그게 걱정이다. 우리는 그렇게 안 한다. 매년 하나 하나 차곡 차곡 지어왔다. 중국 사람들이 너무 욕심내서 혹시나 운영을 잘못 할까봐 걱정이다.”

- 원자력이 미래 에너지로 계속 위치를 고수할 것으로 보나?

“우리가 말하는 원자력 발전소는 핵분열 에너지를 쓰는 것이다. 우라늄이 핵분열 할 때 가벼운 우라늄 동위원소가 있다. 같은 우라늄이라도 가벼운 것이 있고 무거운 것이 있는데 보통 대부분은 238인데 235가 0.7% 정도로만 들어가 있다. 그것을 4% 전후로 농축시킨다. 그러면 핵연료로 쓸 수 있다. 근데 이걸로는 절대 핵무기 못 만든다. 핵무기 만들려면 90% 이상은 농축 시켜야 한다. 우리는 그건 아니고 우라늄이 핵분열 해서 나오는 에너지가 핵분열 원자력 발전소다. 고리, 신고리와 UAE에서 짓는 것도 그것이다. 핵융합은 이런 원소가 아니다. 물은 H2O로 수소 둘 하고, 산소 하나가 분자가 되는데 수소 중에서 좀 무거운 것이 중수소, 무게가 수소보다 2배쯤 무거운 삼중수소가 있다. 무게가 3배쯤 무거운 2중수소, 3중수소가 융합하면 헬륨으로 나오게 되고 나머지 에너지가 많이 나온다. 그것을 가지고 발전을 시키면 핵융합 에너지가 된다. 핵융합 원자력 발전소는 실용화는 안 되고 연구단계에 있다. 1995년 장관 할 때 미래에너지원으로 우주 전체의 99.99%가 핵융합이니까 지구상에서 만들면 좋지 않을까 해서 한국사람으로 제일 먼저 프린스턴 대학에서 핵융합 연구를 했다. 앞으로 언제일지 모르지만 이것이 될 때 한국이 선두가 되어야겠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핵융합 연구 시설을 만들게 됐다. K-Star, 한국의 태양이라고 쉽게 얘기하지만 10년 만에 만들었고 거의 완벽하게 잘 돌아가고 있다. 국제적으로 러시아, 미국, 프랑스, 미국, 일본, 한국, 인도, 중국 이런 나라에서 전 세계가 같이 연구 시설을 하나 대규모로 만들자고 해 경쟁이 붙었다. 일본과 프랑스가 경쟁해서 프랑스가 이겼다. 프랑스가 지금 국제공동 핵융합 원전을 짓고 있다. 그 전에 우리는 소형으로 하나 지었기 때문에 기술자들이 경험이 있으니까 그곳에 가서 활약하고 있다. 대전에 있는 K-Star에서 실력을 발휘했던 사람들이 그곳에서 실력 발휘하고 있다. 거기도 우리가 선두주자다. 굉장히 우리 후배들이 자랑스럽다.” 

- 우리나라 원자력 학계 실력이 세계에서 꽤 인정받는 수준인가?

“1990년대만 해도 미국의 원자력 학회에서 멤버는 회원이고 펠로우는 멤버중에서 경험 많고 업적이 좋은 사람들 석학 회원으로 하는데 한국 사람은 내가 제일 먼저 됐다. 지금은 여러명이 나왔다. 내가 지금 옷에 단 뱃지가 미국 한림원 회원 뱃지다. 미국 시민권 딴 분은 있을지 몰라도 한국 국적으로 미국 한림원 멤버가 된 것이 내가 처음이고 이것이 아주 힘을 많이 발휘한다.”

- 세계에서 우리나라 물리학 수준은 어떤가

“우리 젊은 사람들이 잘한다. 다만 너무 단기성과를 추구하기 때문에 좀 깊은 연구를 더 해야한다.  아인슈타인이 평생 쓴 논문이 4편이다. 그런 식으로 우리나라도 질을 중요시 할 때가 됐다.”

- AI, IoT, 빅데이터 발전도 넓은 의미에서 물리학인가?

“물리학과 좀 다르다. 데이터를 어떻게 취급하느냐는 정보공학이다. 물리학처럼 깊은 사물에 기본 원리를 추구하는 것보다 정보가 나온 것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메모리 반도체를 어떻게 활용하느냐 빅데이터를 어떻게 파악해서 우리가 의사결정에 쓸 수 있느냐 등을 알아보는 것이다.”

- 정보공학 분야도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꽤 수준이 높지 않나?

"높아야 한다. 나는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과학기술 영재들을 우리가 지원 해줘야 한다. 탈원전하는 얘기 말고 기존 영재들에게 자부심 갖게 하는 정책들을 펴야 한다. 1957년 국제원자력기구가 출범할 때 우리도 원자력 해야 된다고 해서 창립회원국이 되지 않았나. 그 전 해에 미국 디트로이드 에디슨 전력회사 회장이 우라늄을 보여주면서 한국은 두뇌자원을 써라. 이게 두뇌자원이 만들어내는 에너지라고 말해 이승만 전 대통령이 그래야겠다 해서 1957년에 국제원자력기구가 창립될 때 회원국이 됐다. 1958년에 원자력법 통과되고 1959년에 원자력원 국가 부처 만들고, 원자력 연구소를 1959년 2월에 만들고 1959년 7월 14일에 최초의 실험 원자로 기공식을 가졌다.”

- 어려서 수재 얘기를 듣고 자랐는데 스스로 생각하는 본인은 어떤 사람인가?

“후배들을 위해 밑거름이 된 하나의 밀알 정도로 생각한다.”

- 두뇌가 좋은 건 사실 아닌가?

“학교 다닐 때 성적은 좋았다. 그래서 당시 국민학교 졸업하고 중학교 들어갈 때 국가시험 전국 1등을 했다. 지금 말하자면 수능성적 1등과 같다. 그때는 6.25 사변중이니까 1951년에 중학교 들어 갔다. 경기중학교 다니면서 열심히 공부했다. 검정고시를 고등학교 1학년 때 패스하고 1학년 끝나고 대학입학시험을 봐서 서울대 문리대를 갔는데 후회한다. 공부는 천천히 해야지 빨리하면 공부 같지가 않다. 2년을 월반하니까 선배들하고 어울려야 하고 2년 동안 다른 사람이 놀진 않았을테니 내가 모자란 점이 너무 보였다. 만약에 그런 기회가 있으면 절대로 월반 안 하고 순서대로 공부할 것이다. 공부는 즐거워야한다.”

- 미국가서도 과학기술 분야에서 리더 역할을 한 것 아닌가?

"미국 가서 공부는 쉽게 해서 박사학위도 일찍 끝내고 교수도 일찍 되고 프린스턴 가서 연구도 하고 고등연구소도 다니고 MIT 교수, 뉴욕공대 연구소장도 해봤다. 그러다 한국이 불러서 귀국했다. 이때가 30대 초반이다. 카이스트 만들 때가 31살 때다. 나를 미국에 데려간 분이 미시간 주립대 총장인데 그분이 국방부 차관을 해서 이승만 전 대통령을 잘 알았다. 이 전 대통령이 내가 행정대학원 들어가니까 꾸짖고 물리학 다시 공부하라고 하면서 그 사람한테 편지를 쓰고 나에게 장학금을 주라고 했다. 그때 그 심부름 해준 사람이 최치한 국회의원이다. 그 분께서 저를 중요한 때마다 많이 도와줬다. 카이스트 만들 때도 그 분이 국회에서 다 해주고 정부에 과학기술이 살 길이라며 긍정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 어렸을 때 어떤 환경에서 자랐나?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셨고 어머니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다. 어머니는 경기여중, 아버지는 공주사범을 나와서 어머니가 급수가 높았는데 어머니는 교장 선생님 안 한다고 하셔서 아버지만 하셨다.”

- 비교적 교양있고 다복한 가정에서 자란 것 같은데?

“어머니가 상당히 책을 많이 읽고 글을 많이 쓰셨다. 아이들 교육에 대해 점수 받는 것 보다도 음악, 미술 등 교양 교육을 많이 시키셨다.

- 형제는 여러명이었나?

“5남매 중 중간이다. 여동생 둘이 있는데 의사, 하나는 컴퓨터 전문가다. 집안은 주로 학교와  관계가 많다.”

- 악기도 연주하는 것으로 아는데 어떤 악기를 연주하나?

“어릴 때 피아노 조금쳤다. 아내가 피아노를 공부했는데 주눅들어서 피아노를 안 쳤다.”

- 자녀는 몇 명인가?

“3남매로 딸 둘에 아들 하나다. 아들이 많이 아팠다. 결국 자식 남매를 놔두고 36세에 하늘나라로 갔다. 지금 아들의 큰딸은 3남매를 낳고 막내딸은 아들만 넷을 낳아서 손자가 5명에 손녀가 2명이다.”

- 아들이 아파서 어려웠던 것으로 아는데?

“엄청나게 어려웠다. 그때 카이스트 만든다고 나왔는데 감기를 심하게 앓았다. 치료를 잘못한 것이 신장염이 돼 가게 됐다. 내가 신장 하나를 줬다. 지금 생각해보면 30대 후반 40대 때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도 안 난다.”

- 인간 능력에 대해 어떤 믿음 갖고 있나?

“요즘도 교회 가서 간증을 많이 한다. 그때마다 말하는 것이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살아 계시다는 단어가 어폐가 있지만 하나님은 영원에서부터 영원에까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니까. 그것을 인정해야 된다. 믿지 않는 사람도 죽으면 지옥 간다는 얘기 하는데 그건 영혼이 있다는 얘기 아닌가. 우리는 육신은 많이 알아도 영혼에 대한 생각 별로 안 하지 않나.”

- 말하자면 신의 존재를 믿나?

“당연하다. 아인슈타인도 말년에 쓴 자서전에 보면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처럼 바보가 없다고 했다.”

- 젊었을 때 한 얘기를 보면 지극히 종교적인 불신자라고 한 얘기가 있던데

“그건 젊었을 때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과학자는 과학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 한 때 인격신은 믿지 않는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아인슈타인의 자서전을 보면 나이가 들면서 변화하는 걸 볼 수 있다.”

- 물리학자 중에 불가지론자가 많은 것 같은데?

“1989년에 국제원자력기구 의장이 됐다. 그때는 우리가 유엔 회원국이 아닐 때다. 그런데 국제원자력기구니까 내가 이사가 됐고 이사가 된 다음에 열심히 하니까 의장으로 무투표 당선이 됐다. 소련 대표가 나를 지지하는 연설을 했다. 국제원자력기구는 과학기술이 중요한데 한국 이사가 원자력을 잘 알고 있으니 외교관이 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판단했다. 그래서 나를 지지한 것이 사실은 소련 이사와 동독 이사다. 명목상의 수장은 의장이다. 국제기구의 첫번째 의장이 내가 됐다. 외교관께는 죄송하다. 나는 과학자고 분야가 다른데 그러나 나한테는 영예다. 된 후에 신문이 많이 보도해서 귀국해 인터뷰를 하는데 왜 과학자가 그렇게 열심히 예수를 믿느냐고 묻더라. 그래서 예를 들어 에베레스트 산 꼭대기에 진리가 있다고 하면 서쪽에서도 올라갈 수도 있고 동쪽에서도 올라갈 수 있지만 가장 쉬운 건 서쪽 네팔에서 올라가는 것 아닌가. 과학자들도 진리를 추구하고 신학자도 진리를 추구한다. 우리가 성경을 믿음으로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건데 그것이 진리를 만나는 것이다.”

- 왜 물리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나?

“원래 물리학에 소질이 없었다. 고등학교 1학년 끝나고 대학 어느 학과로 갈 것인지 고민하니까 그 당시에 물리학계에 권영대 선생님이 동숭동에 살았는데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가서 의논을 드렸다. 선생님이 자네가 인문학을 원한다면 물리학을 알고 인문학을 하는게 좋을 것이다라고 조언해주셨다. 앞으로는 과학기술 문명시대이니 물리학을 아는게 기본이 될 것이다라고 해서 내가 물리학을 했다.”

- 물리학을 쭉 한 것 보면 재밌었나 보다

“졸업하고 행정대학원에 갔다. 행정대학원 간 것이 처음부터 생각이 있어서 한 것도 있다.”

- 정치에도 관심 있나? 2007년에 대통령 후보로 추대 받은 적이 있는데?

"참주인연합에서 나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 하겠다고 그랬다. 당시 한나라당도 이명박 후보로 결정되고 야당에서는 정동영씨가 후보로 나오고 하는 9월인데 그때 나서서 선거에 이긴다는 건 말도 안 됐다. 미국에 나와 같이 기도하는 국무차관, 상공부장관 이런 분들이 있어 조언을 구했다. 조그만 정당에서 나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어보니 하라고 하더라. 떨어질 게 뻔한데 왜 하냐고 되물으니 자기들이 다른 군소국가에서 자문을 해달라고 하면 내 이름을 대는데 그곳 정치인들이 내 이력서를 보고 우리 하고는 상관없는 사람이다라고 말한다더라. 미국 한림원 회원이고 원자력 전문이지 자기들하고 대화가 안 될 것 같다고 아예 관심을 안 갖는데 만약 당신이 한국의 대통령 후보였다고 하면 그 사람들이 달라질거라며 말하더라.그때 김중건 목사가 기독교가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된다고 생각하는 분인데 한때 이명박 후보가 좀 위태위태 했었다. 한 번은 목사들 다 모아 놓고 우리 기도하자고 하는데 기도가 끝나니 지금 이명박 장로가 혹시나 노무현 정부에서 자격박탈 되면 우리 후보가 없지 않나. 그러니까 여기 정장로를 우리가 후보의 후보를 하자 이렇게 말하더라. 내가 국내에서는 이명박 후보의 후보였고 해외에서는 정치가 아니라 우리 한국의 국제적인 영역을 넓히는데 그분들이 활용을 하겠다고 하니까 한 것이다. 사실 UAE에 원자력을 수출하게 된 것이 그 영향이 있는 것이다."

- 과학기술 장관도 두 번 했는데?

“재수했다.”

- 정치에도 관심 있는 거 아닌가?

“잘 알겠지만 예를 들어 삶의 영역이 나는 신앙인으로 교회도 삶의 한 영역이고 직장도 영역이고 연예, 스포츠 그쪽도 영역이고 경제계, 정치계도 영역이다. 정치처럼 많은 영향을 끼치는 분야도 드물다. 원전 관련도 그분들이 원전 내용을 본인들은 모르지만 결정을 하니까 엄청난 영향력이다. 정치는 죄송하지만 속된 말로 더럽다고 외면해선 안된다. 정치도 삶의 중요한 영역이다. 국민들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 한국 정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상당히 비하하는 사람이 많은데 나는 그동안 많이 발전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민주사회를 쟁취한 것 아닌가. 그것은 인정 해줘야 한다. 정치적으로도 많이 자랐는데 아직도 국민이 아쉬워하는게 있다. 너무 정치적으로 결정하고 전문성이 결여 돼 있다. 저는 정치하는 사람들이 도량을 넓혀서 혹시 잘 보지 못한 분야가 있으면 전문가한테 물어보고 결정을 잘못하면 철수하고 옳은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마 문재인 대통령도 지금 신고리 5, 6호기 말은 했는데 언론이나 여러 전문가 얘기하는 거 보니까 내가 모르는 것이 많이 있었다 잘 듣고 보니까 이미 30% 진행되고 최신 설계는 다 지어 놓은 상태에서 우리가 에너지 전력 기획을 매 2년마다 하니까 이번에 8차 전력 계획을 연말에 해야 한다며 우리가 원자력에 장기적인 위치를 어느 정도로 만들어 놓겠다 이 건에 대해서 내가 귀를 열고 듣겠다 하면 아마 인기가 엄청 올라갈 것이다.”

- 한국 교육제도 문제 어떻게 생각하나?

“내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지식이 갈급했다. 교과서가 있나 실험실이 있나 선생님이 있나. 그러나 지금은 안 그렇다. 요즘은 스마트폰, 컴퓨터 때문에 지식 공급이 넉넉해서 본인이 부지런하면 공부할 수 있다. 그런데 지식 전달만이 교육이 아니다. 교육은 품성 함양을 하는게 목적이다. 스승과 제자 간의 인간적인 만남이 있어야 될 것이다. 정말 존경하는 스승을 만나게 되는 것처럼 행복한 것이 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내 일생에 스승을 여러분 만났지만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의 음악 역사 교육이 아직도 생생하다. 모형비행기 만들어서 한강변에 가서 띄우던 선생님, 중학교 때 사회 생활의 핵심이 뭔지 가르쳐 주셨던 인격자 서장섭 선생님, 대학 때 권영대 박사, 김범례 박사 밑에서 한국 과학기술의 미래에 대한 얘기를 직접 들은 것. 미국 가서 미시간 주립대 총장했던 미국 공화당 중진의원 등 강의실이 아닌 인간적으로 배우는게 참 많았다. 교육은 사람을 만들어주는 게 중요하다.”

- 대학의 학생 뽑는 제도 어떻게 생각하나?

“너무 기계적이다. 중고등학교때 우리가 발견해줘야 하는 것이 사람마다 갖고 있는 재능을 발견해주는 것이 교육의 중요한 과정이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들 점수 벌레가 된다. 요즘처럼 맨날 학원 가서 공부하고 학교 가서는 졸면 어디서 참교육을 받나.”

- 젊은 세대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너무 단기적인 이해 관계에 몰두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물론 단기적인 것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그러나 장기적 비전이 있어야 한다. 자기를 알아야 한다. 자기를 모르면서 점수만 높게 따면 잘했다고 하는데 절대 아니다. 자신을 알고 장기적인 목표는 갖고 있지만 지금 최선을 다하는 그런 젊은이가 늘어나는 것 같다.”

정근모 박사는…

1939년 생. 1959년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수료했다. 1963년 미국 미시간주립대에서 이학박사를 받았다. 1990년ㆍ1994~1996년 과학기술처 장관, 2000~2004년 호서대 총장, 2004~2007년 명지대 총장을 역임했다. 현재 카이스트 석좌교수로 있다. 번역서로 《일본이 힘있는 나라가된 이유》(1993)가 있다.

<사진=한명섭 사진부장 >

저작권자 © 한국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