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적 학술 네트워크 무너지면서 국가적 신뢰 상실 우려도

16곳 연구소 HK연구교수 92명 실직…핵심 연구인력 방출 우려
교육부 “예산 확보 쉽지 않아, 총괄평가 후 HK+ 재진입” 입장 고수

▲ 지난 21일 이화여대에서 HK연구소협의회 총회가 개최되고 있는 모습.

[한국대학신문 장진희·김정현 기자] 인문학 국책지원 사업인 인문한국플러스(HK+)사업에 기존 인문한국(HK)사업 연구소가 배제돼 논란이다. 인문학자들은 10년간 쌓아온 특성화된 ‘어젠다’ 중심 연구가 공염불이 된다며 우려하고 있다.

8월 말로 사업이 종료되는 HK연구소는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이화여대 이화인문과학원·한국문화연구원 등 2007년에 진입한 16곳이다. HK연구소들에 대한 총괄평가가 끝나지 않았지만, 교육부는 지난 8월 9일 HK+ 사업계획을 발표하며 기존 HK사업단의 지원을 막겠다고 발표했다.

이를 두고 기존 HK연구소들은 ‘세계 유수의 인문학연구소를 길러낸다’는 사업 취지와도 맞지 않는 ‘무책임한 행정’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HK연구소협의회는 8월 18일 성명을 내고 “인문학연구소의 세계화는 철저한 마스터플랜뿐만 아니라 장기적인 지원정책이 유기적으로 결합돼야 달성할 수 있다”며 “경쟁력을 갖춘 최적의 기초인문학 집단과 연구역량을 구축한 기존 43개 연구소를 배제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헌법상의 기회균등 원칙에도 어긋난다”고 비판했다.

실제 각 연구소는 세계 각국 대학 인문학계와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어젠다’ 중심의 특성화 된 인문학 연구에 몰입해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왔다. 실제로 교육부의 성과 분석에 따르면 정년트랙 HK 교수들이 내놓은 논문 성과는 일반 전임교원의 3배에 달한다. 또 2015년까지 연구소들이 발표한 총 6308건의 논문 90%가 연구재단 등재지와 인문학 분야의 인용지수인 A&HCI(Arts and Humanities Citation Index) 학술지에 게재됐다.

대체 불가능한 연구를 해오던 이들에게 지원 중단은 사실상 ‘사형 선고’에 가깝다. 연구소에 속한 연구 인력들은 그동안의 연구를 접고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기 때문이다.

일례로 부산외대 지중해지역원은 지난 10년 동안 지중해문명교류학을 연구해왔다. ‘문명교류학’이라는 신생학문의 토대를 닦는 데 집중해왔기 때문에 이 분야의 권위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후속 사업 지원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이 주제로 연구를 지속할 배경이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진재교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장은 앞으로 특성화된 인문학 연구가 지속가능할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표했다. 그는 “HK연구소는 어젠다 중심으로 연구를 해왔기 때문에 항상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야만 했다. 이들은 한국에 하나씩밖에 없는 경쟁력 있는 연구 집단”이라며 “기존 학과와는 다른 연구방법론과 주제를 택했기 때문에 중간에 사업이 중단되면 재가동하는 데 더 큰 비용을 치러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HK 연구교수(비정년트랙) 및 연구보조원(조교)들의 고용불안도 문제다. 이들 역시 최대 10년 동안 어젠다 중심의 연구를 통해 인문학 발전에 기여해왔던 핵심집단임에도 불구하고, 당장 사업비 지원이 끊기면 일자리를 잃게 되는 상황이다. 16곳 연구소에 92명의 HK 연구교수가 불안에 떨고 있다. 특성화된 연구에 집중해왔기 때문에 타 연구소에 재취업도 힘든 처지다.

김재희 이화여대 HK 연구교수(이화인문과학원)는 “우리 대학 연구소 11명의 연구교수가 다 망연자실하고 있다. 짐을 싸서 곧 나가야 하는 상황”이라며 “아직 성과를 내지 못하고 진행 중인 사업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 4년 동안 ‘기술과 인간의 관계’를 주제로 포스트 휴머니즘 연구를 해왔고 국제사회에서 인지도도 쌓았다. 당장 국제학술대회 강연이 잡혀 있는데 그 비용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 황망하다”며 “특수 분야 연구에 집중해왔기 때문에 다른 연구소에 고용될 수 있을지도 의문인 상황”이라고 밝혔다.

백원담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장도 연구교수 인력 방출이 결국 또다시 인문학 연구지속성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전망했다. 그는 “연구소에서 함께 연구해왔던 인력들이 모두 해고될 판이다. 연구교수들이 해당 분야 권위자나 다름없는데 이제 어디서 인재를 찾겠느냐”고 지적했다.

세계 속 한국 인문학 경쟁력이 뒤떨어질 수도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원이 끊기면 연구소가 국제학술지 발간 및 국제학술교류 사업 등에 쓰던 비용을 감당할 재원이 사라진다. 한국 인문학이 국제학술사회의 신뢰마저 잃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백원담 소장은 “우리 대학 연구소는 지난 10년 동안 ‘문화로서의 아시아’라는 연구 의제로 아시아 지역 23개 대학과 네트워크를 형성해왔다”며 “세계적인 연구소를 만들라고 해놓고 사무국인 우리 대학의 지원을 끊으면 국제사회에서 신임이 크게 떨어질 것”이라고 비판했다.

HK연구소협의회는 평가를 통해 기존 사업단 중 일부를 신규 사업단과 함께 HK+사업에 진입시키자는 ‘투트랙’을 요구하고 있다. 김성민 HK연구소협의회장(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장)은 “HK+ 예산 136억원은 1기 사업과 함께 2기 사업을 포괄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결코 신규사업단 진입을 배제하자는 것이 아니다. 충분히 투트랙으로 운영해 윈윈(win-win)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교육부는 여전히 기존 사업단 총괄평가 후 내년도 HK+사업에 재진입할 기회를 부여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HK 인문학자들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날 전망이다. 교육부 관계자는 8월 24일 “총괄평가가 끝나지 않은 사업단에 재진입 기회를 준 전례가 없으며, 평가 결과를 보고 적절한 연구소를 지원한다는 기본 원칙에는 변화가 없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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