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신사참배 강요에 유일하게 자진 폐교…1954년 서울에 재건

조만식·안익태·한경직 등 문화·예술·종교·정치·사회 지도자 배출

[한국대학신문 이현진 기자] 올해 창학 120주년을 맞은 숭실대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대학으로서, 끊임없는 창의적 도전을 통해 실용학문의 길을 개척해왔다.

1897년 선교사 윌리엄 베어드 박사가 평양에 설립한 ‘숭실학당’은 1906년 '한국 최초의 4년제 대학'으로 인가를 받아 근대 대학교육을 시작했다. 기독교 신앙과 지식이 조화된 ‘실용적’ 인재 양성을 목표로 평양 땅에 ‘숭실’을 세운 베어드 박사는 출범 초기 입학생 대부분이 성적은 우수하나 경제 형편이 어려운 사정을 알고 당시 미국에서 널리 행해지던 산학협력 모델인 ‘학생자조기관 기계창’을 도입했다. 이로써, 학생들이 근로 활동에 참여하며 등록금과 기숙사 비용을 마련했을뿐 아니라 졸업 후 자립과 직업 선택의 유용한 기술 교육도 받을 수 있었다.

숭실대학은 일제 식민지 지배 하에서 나라의 독립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독립운동에도 앞장섰다.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된 재학생과 교수진 15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1915년 재학생과 동문을 주축으로 국내 최대 항일비밀결사단체 조선국민회를 조직하는 등 독립을 향한 숭실의 열정은 뜨거웠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평양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1938년에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국내 대학으로는 유일하게 자진 폐교를 단행함으로써 민족적 자존심과 신앙적 절개를 지켰다.

폐교 16년 만인 1954년, 서울에 재건된 숭실대는 평양의 숭실대학이 당시로서는 최첨단 학문인 물리·화학·생물·지질·광물·천문·음악·경제·법률 등 실용학문을 교과목으로 채택해 대한민국 고등교육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듯이, ‘최초’라는 이름에 걸맞게 △국내 최초 전자계산학과 신설 △국내 최초 중소기업대학원 설립 △국내 최초 IT대학 설립 △국내 최초 신입생 대상 통일 교육 실시 등 ‘최초의 역사’를 만들어왔다.

특히 IT강국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기까지 숭실대는1960년대 선구적으로 컴퓨터를 도입하고 최초의 컴퓨터교육을 시작해  IT 교육에 앞장섰다. 이어 1987년 정보과학대학원을 신설했으며, 1996년에 국내 최초의 정보과학대학을 세워 IT인재 양성을 주도했다. 2006년에는 기존의 정보과학대학과 공대 소속이었던 정보통신전자공학부를 통합해 국내 최초로 IT 대학을 신설했다. 2015년에는 소프트웨어학부와 스마트시스템소프트웨어학과를 신설해 급변하는 IT 분야에 발맞춰 전문적인 교육을 하고 있다. 2017학년도에 신설된 융합특성화자유전공학부는 ‘융합적 역량을 가진 창의적 인재양성’을 목표로 미래 사회를 선도하는 전문 인재를 기르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숭실대는 다가올 통일시대와 제4차 산업혁명 시대 주역을 길러내는 데 매진하고 있다. 이를 위해 ICT 융·복합 학문과 연구로 학생들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숭실통일리더십스쿨, 봉사 교과목, 인문학·글로벌 프로그램, 경력개발과정을 충실히 준비하고 있다. 숭실이 급변하는 교육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잘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굳건한 건학정신과자랑스러운 역사의 힘이었다.

 

<역사 속 동문소개>
■ 민족의 지도자 조만식 = 
1922년 조선물산장려회 조직, 1927년 신간회 조직, 1945년 조선민주당 결성 등 조만식선생의 업적은 민족의 지도자로서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숭실인으로 거듭나서 기독교 신앙을 생활화하고 신앙생활과 민족운동을 일치시켜 숭실의 정신을 구현한 진정한 인물이다. 낡은 두루마기와 말총모자, 그리고 고무신을 신은 외모가 상징하듯이, 평생 동안 근검절약과 국산애용을 실천한 건실한 생활인의 표상이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비폭력, 비협력에 의한 저항으로 일제와 공산당의 견딜 수 없는 탄압에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지조인의 상. 바로 숭실의 표상이다.

■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 = 애국가를 작곡한 세계적인 작곡가 안익태가 그의 가치세계와 민족정신을 닦은 곳이 바로 숭실학교이다. 숭실은 명실공히 애국자의 양성소였고 민족정신의 훈련도장으로서 당시 민족주의 사상과 애국정신이 가장 강렬한 학교였다. 숭실의 학생들은 행사가 있을 때마다 옷깃을 바로 하고 애국가를 부르며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이렇게 애국가는 숭실을 통해 전 민족에 퍼졌다. 그의 친필로 된 애국가 오선지 악보는 숭실대 내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되어 보는 이들의 애국 혼을 깨우고 있다.

■ 한국 기독교의 사표 한경직 목사 = 평남 평원에서 출생해 1925년 숭실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해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했다. 1932년 신의주 제2교회에서 목회활동을 시작했으며 1945년 서울에 영락교회를 창립했다. 예수교 장로회 총회장과 숭실대학 학장, 한국 기독교총연합회 대표를 역임했다. 197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상했으며 1992년에는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하는 템플턴상을 수상했다. 피난민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사업에 일생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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