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백 홍익대 교수(교육)

지금 대한민국 냄비가 요란하게 끓고 있다. 내가 학교 선생인지라 주목하고 있는 그 냄비 이름은 ‘4차 산업 혁명’이다. 누구든 이 주제를 선점한 사람은 속칭 ‘대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불철주야 모두 잡히지 않는 이 뜬구름을 잡으려고 사람들이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내에, 예전에도 늘 그랬듯이 자신을 위해 이익을 챙겨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전문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대학교육이, 아니 우리 교육이 4차 산업 혁명으로 인해 바뀔 것이라고 장밋빛 미래를 제시한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에게, 특히 대학 교육에 무슨 변화를 가져올 것인지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이는 없다.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로봇공학 등이 제시하는 거시적인 교육의 프레임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 소위 4차 산업 혁명이라는 것을 이끌고 있는 이들 테크놀로지를 관통하고 있는 공통적이고 일관된 특성이 인간의 삶을 어떠한 방식으로 변화시킬 것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테크놀로지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인간에 대한 관점을 우리가 이해해야 비로소 교실에 그러한 테크놀로지를 적용할 수 있는 방안들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연결돼 있고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디바이스가 데이터를 언제 어디서나 서로 공유하게 하고 인간의 의사결정을 돕는다는 것. 이것은 대단히 큰 교육적 시사점을 준다. 테크놀로지를 파편화된 관점에서 보지 않고 하나의 커다란 시대적 흐름으로 파악할 수 있는 안목이 요구된다. 이러한 안목으로 대학의 수업을 어떻게 개선할지 논의해야 한다. 단순히 교실에 가상현실체험을 할 수 있는 기계를 들여 놓은 것으로 대학 교육의 개선이 이루어진 것이라 생각하면 착각이다. 실제로 테크놀로지를 수업에 도입하는 교수는 학생을 대상으로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전략이나 방법을 논의하고 그 효과가 학습 내용에 따라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는지 살펴봐야 한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나는 두렵다. 대학 교육에 이러한 지적이 또 다른 행정 업무 부담이 돼 내게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대학의 구조를 개혁하고 교육을 개선한다는 명목 아래 진행되고 있는 수많은 대학평가에서 교수들은 수업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제공받는 사람이 아니라 행정 관료들을 보조하는 기록요원으로 전락하고 있다. 수업과 관련된 개선 사항을 일일이 기록하고 문서화하는 것은 교수가 해야 할 일들이 아니라 교육 지원 서비스를 제공하고 자원을 배분하는 행정 관료나 직원이 하는 일이다. 지금 우리 대학은 우리가 왜 교육을 하고 있는 지에 대한 본질은 생각하지 않고 형식만 남아있는 상태다. 모든 대학 경영자 및 행정 관료들은 어떻게 하면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 오로지 수업에 열중할 수 있을까 또는 연구자들이 연구를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불필요한 제도나 규제들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지원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교육 관료나 대학 당국자들이 어떻게 하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교수에게 떠넘길 것인가 고민하는 사람들 같다.

교수는 가르치는 사람이며 연구자이지 행정 보조 인력이 아니다. 학생은 우리 미래의 주인이며 교육의 주체이지 교육상품을 구매하는 교육 수요자가 아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경험하는 교육의 질을 높이는 것은 해당 분야를 30년 가까이 공부한 교육자로서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교육의 핵심가치이자 본질이다. 이 양보할 수 없는 교육의 가치와 본질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서 사라지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 대학교육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있다. 허세와 겉치레에 물든 사회의 병폐를 학문의 전당이 되어야 할 대학이 그대로 닮아가고 있다. 효율성만을 따지는 논리위에서 대학의 교실은 병들어가고 있다. 적은 자원으로 최대한의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하는 경제 논리가 교육을 망치고 있다. 학생들은 효율성의 논리에 몰려 실패할 기회조차 인정되지 않으며 실패는 즉시 경쟁에서의 탈락을 의미한다. 실패의 교육적 가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실패가 용인되는 사회를 만들자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정작 실패가 무엇인지 실패의 경험을 어떻게 성장의 기회로 만들어나갈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논의와 고민 없이 구호만 외친다.

사람들은 교육을 백년지대계라 한다. 우리가 시간을 두고 교육에 대해 철저하게 고민을 거듭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고민해야할 대상이 물건이 아니라 미래를 짊어질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교육은 진열대 위에 상품이 된 지 오래다. 교육 관료나 정치가들은 지난 수십 년간 계속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장사꾼이 됐다. 선진 외국의 대학들은 수백 년의 세월동안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학문적인 자율성과 공공성을 보장받았기 때문에 성장할 수 있었고 사회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었다. 우리 교육은 소위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놀라운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하지만 나는 교육이 또 다른 기적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에는 동조하지 않는다. 적어도 현재의 상황에서는 그렇다. 작금의 상황은 온갖 정치가들, 관료들, 그리고 장사꾼들의 논리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한국의 대학이 목하 냄비 안에서 끓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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