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희 제주한라대학 교수

▲ 이종희 제주한라대학 교수

방학 동안 ‘일본어 동아리’를 운영했다. 학기 말에 학생들은 방학 동안 일본어를 공부하겠다는 의욕이 넘쳤고 원어민 특강을 한다고 했더니 반색을 하며 반겼다. 방학 특강을 통해 연말에 있을 능력시험 준비도 하고 급수를 꼭 따겠다고 다짐도 했다. 그러나 그건 방학이 시작되기 전이면 ‘이번 방학만은..."이라며 다짐하는 ‘신년 맞이 다짐’과 같은 성격의 다짐이었다. 방학이 시작되자 어떤 학생은 여행을 떠났고, 또 어떤 학생은 아르바이트라는 벽에 부딪혀 출석하지 못했고 다른 어떤 학생은 늦잠으로 인한 결석에 미안해했다. 애초 약속했던 학생 중 반 정도가 겨우겨우 명맥을 유지하며 특강에 참석했는데 방학 특강의 마지막 프로그램은 일본영사관 탐방이었다. 담당 영사님과 약속을 잡아놓은 체면도 있고 해서 최대한 많은 학생을 동원해 가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방학 때 학생을 동원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더 어렵기 마련인지라 꼭 오겠다며 약속했던 학생들이 전날 저녁부터 당일 아침까지 줄지어 문자를 보냈다. 십중팔구 이런저런 사정으로 못 오겠다며 죄송하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약속 직전에 갑작스럽게 약속을 취소하는 경우를 일본어로 ‘도타캰(どた・キャン)’이라고 한다. ‘도탄바(土壇場・どたんば)'와 '캔슬하다(キャンセルする)’라는 단어가 합성돼 생긴 단어이다. ‘도탄바(土壇場・どたんば)'란 단두대를 뜻하기도 하고 생사를 넘나드는 매우 결정적 순간을 뜻하는 일본어로 약속과 신뢰가 중요한 일본 사회에서 ‘도타캰(どたキャン)’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예의에 어긋나는 행위에 해당한다. 일본인보다 우리는 즉흥적인 민족이라 할 수 있겠다. 기분이 내키면 어디론가 훌쩍 떠나는 것을 낭만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계획에 없던 만남인 ‘번개’가 성사되면 신나기도 한다. 매사에 계획적이고 꼼꼼한 일본인에게 그런 우리 모습은 당혹스러운 충동적 모습으로만 보여 예측 불가능한 한국인에 대해 놀라워한다.

일본인뿐만 아니라 외국인에게 신기한 한국인의 모습은 그뿐만이 아니다. 음식 문화만 살펴보더라도 입에서 빨간 불꽃이 튈 것같이 매운 불닭의 맛, 전화 한 통에 바닷가든 한강 둔치든 달려와 주는 짜장면과 그 배달의 속도, 가스버너 위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데도 시원하다는 매운탕, 고소하다며 참기름에 찍어 먹는 꿈틀꿈틀 움직이는 산 낙지, 뒤에 온 손님의 주문이 먼저 나왔을 때 항의하기 위해 열심히 눌러대는 식탁 위의 벨.... 열정적이다 못 해 가까이 있으면 델 것만 같이 뜨거운 한국인이다.

이렇듯 역동적이고 다이나믹한 한국 사회에서 ‘도타캰(どたキャン)’는 당연한 일상의 한 모습일 것이다. 우리는 약속을 취소하는 사람도, 취소당하는 사람도 으레 그러려니 하며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상대방이 언제든 나와의 약속을 깰 수 있다는 암묵적 전제가 깔린 사회란 어쩜 서로가 신뢰하지 못하는 사회일 수 있지 않을까? 사회적으로 전혀 신뢰받지 못하는 직업군도 존재한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는 ‘안녕하세요? 고객님’이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걸 때 우리는 그녀의 목소리와는 반대되는 짜증스럽고 냉정한 태도로 끊어 버리기에 십상이다. 터무니없는 마케팅에 화가 나기도 하고 꼭 바쁜 시간에만 걸려오는 머피의 법칙에 어이가 없기도 할 것이다. 이렇게 신뢰받지 못하는 마케팅이 꾸준히 이어지는 한국은 사회적 나이가 과연 몇 살이 되는 걸까 생각해 본다. 급속한 노령화와 저조한 출산율을 걱정하기는 하지만 아마 사회적 나이는 아직 피가 끓는 청춘인가 보다.

나는 치열한 속도전의 청춘 사회보다는 안정감 있는 신뢰 사회를 꿈꾸며 식어가는 옅은 차를 한 모금 마셔본다. 생기발랄한 젊은 날엔 입에도 대지 않았던 몸에 좋다는 우엉차이다.

<한국대학신문>

저작권자 © 한국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