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희 제주한라대학교 교수

▲ 이종희 교수

존경하는 교수님 부부가 계시다. 아담한 체구에 밝고 따뜻한 웃음이 닮은 교수님 부부이시다. 두 분은 초등학교 1학년 때 짝꿍이었다가 스무 살 때 같은 대학교에 나란히 입학해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었고 서로의 인연을 알아보고 백년가약까지 맺은 명실상부한 ‘천생연분’의 커플이시다.

언어학을 전공하신 K교수님을 처음 만난 건 일본에서 유학하던 석사 1년 차 때였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소장하고 있던 문헌을 직접 보러 한국에 왔을 때 지도교수님의 소개로 뵙게 되었는데 단아하면서 겸손하신 인품에 존경의 마음을 품게 되었다. 이후 나의 박사 말년 시절, 교수님이 안식년을 맞아 일본의 우리 대학에 1년간 연구교수로 와 계실 때 사부님인 L교수님도 뵙게 되었는데 호탕하시고 유머러스하며 따뜻한 성품에 금방 반해버리고 말았다.

지금도 잊지 못할 추억 중 하나는 풋비린내가 나는 나의 박사 학위 수여식에 당시 큰 어른이셨던 두 분이 참석하셔서 고국에 있는 가족들을 위해 학위 수여식 모습을 손수 동영상으로 담아 주셨던 영광스러운 사건이 있었다. 외국에서 외롭고 고달프게 유학 생활을 하던 나에게 정말 생각치도 못한 귀중하고 감격스러운 선물이었다. 그 선물은 개인적 친분에 의해 만들어졌다기보다 가난한 유학생에 대한 연민과 위로 그리고 격려의 마음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 뒤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K교수님은 우리 부부에게 교대로 강의 자리를 마련해 주시고 배고픈 시간 강사에게 자주 점심을 사주시기도 했다. 전임이 된 지금 돌이켜보면 외래 강사로 오는 분들에게 그렇게 매주 식사를 대접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되었다. 금전적인 부담은 차치하고 자신의 강의 스케줄과 자잘한 교내 업무가 밀려 있을 때는 정기적으로 누군가와 식사를 해야 한다는 게 매우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시절 교수님은 비단 우리 부부에게만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 모두에 배려와 존중을 실천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때 교수님 부부의 삶의 원칙과 태도는 내 삶의 롤 모델이 됐다.

동갑내기 교수님인 이 두 분은 이제 올해로 정년을 맞이하셨다. 고전 철학자이신 L교수님이 38년간 머무셨던 강단을 떠나는 것을 기리어 그간의 학문적 업적과 고매한 인품이 얼마전 모 일간지에 소개됐다. 지금까지 전혀 몰랐던 교수님의 업적을 알게 된 것은 그 일간지를 통해서였다. 부친께서 막내아들에게 ‘집을 사라’고 남기신 유산을 종잣돈으로 후학을 키우기 위한 사단법인 학당을 설립하신 일이며, 매월 350만원의 사비를 털어 가난한 연구자들을 후원하는 등 ‘더불어 사는 삶’의 철학을 온전히 실천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철저하게 자신의 선행을 드러내지 않으시고 정부가 퇴임교수에게 주는 포상도 자격이 없다며 받지 않으시는 단호하고 원칙적인 분이시다.

한없이 낮은 자세로 아무런 조건 없이 주변과 세상에 베푸는 삶을 사는 분이 계신다는 건 팍팍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를 살맛나게 하는 일이다. 지금 내 나이는 교수님 부부를 처음 뵈었을 때의 나이를 훌쩍 넘어버렸건만 아직도 삶은 미숙하기만 하고 가끔 어디로 가는지 방향조차 잃고 만다. 그럴 때 교수님 부부를 떠올리면 집착으로 인한 마음의 잔가지를 툭툭 쳐 내게 된다. 이렇듯 후학에게 등대와 같은 삶을 사시는 L교수님은 정작 지난 3월에 대장암 수술을 받으시고 지금은 1차 항암 치료를 끝내셨다. 교수님이 세월의 무게인 병마를 굳건히 이겨내시고 ‘상상 그 이상의 재미’를 준다는 손주들과 더 즐겁게 ‘제 2의 삶’을 살아주시길 간절히 바라본다. 삶의 롤 모델로 삼기만 했을 뿐 아직 그 누구에게도 롤 모델이 되지 못하는 부끄러운 나는 앞으로도 배울 것이 많기 때문이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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