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 「전국공권력피해자연맹」(전공련) 공동의장(60)은 원래 교수였다. +현재 그의 공식직함은 「부정부패추방시민연합」산하「전공련」의 의장이지만 대학가와 그의 주변에서는 아직도 깍듯이 '윤 교수님'이라 부른다.

그는 지난 71년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부임, 89년 6월 해직 당하기까지 18년간 교수로 봉직했다. 강단을 떠난지 10년이 가까워 오지만아직도 그가 교수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것은 여타 해직교수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차별성으로 신망을 받기 때문. 그 차별성이란 의아하게도 교수로 복직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난 단 한 번도 대학으로 되돌아 갈 것을 꿈꿔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봤자 어차피 또 해직 될 테니까요. 대학의 부정과 부패가 조금도 해소되지 않았는데 제가 어디 얌전히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윤 교수는 그동안 몇몇 대학으로부터 두세 차례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지만 이를 모두 물리 쳤다. 그러면서 대학사회, 그리고 교수사회의 '변방'에만 머물러 왔다. "역대정권과 마찬가지로 '국민의 정부'도 +대학개혁에 대한 의지가 없기는 마찬가지예요. 현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교육개혁도 다 허상입니다. 단지 대민 선전용이 아닌가 의심이 들기도 해요"

그래서 그는 할 일이 많다.

그는 「전공련」 공동의장으로 있으면서 비리 사학재단의 퇴진과 교수의 신분보장을 촉구하는 등 대학개혁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한려대, 광주예대 재단의 퇴진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으며 교육부 등 관계 기관에 교수재임용제의 개정을 지속적으로 촉구하고 있기도 하다.

이같은 일은 대학 내부보다는 변방에서 벌여야 제격이라는 게 그의 주장. +현 교육부에 대한 '변방의 목소리'는 이렇다. "전국에 재임용탈락한 교수가 5백명 쯤으로 계산됩니다. 이 가운데 적지않은 수가 부당하게 탈락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개혁적 인물이라는 이해찬 장관은 이를 해결할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아요. 수많은 해직교수들이 여러 차례 면담을 요청했지만 그 누구도 만나 주지를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는 대학개혁은 물론, 교육부의 개혁을 위한 지속적인 활동을 벌일 작정이다. 물론 변방에 머물면서. 이렇듯 변방을 고집하는 그이지만 스스로 학교를 떠났던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해직을 당했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자신이 해직된 사유는 '유언비어 유포', '학생선동', '학교명예 훼손' 등이었다.

교수신분에 도대체 왜 거짓말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사위를 주동하고 +결국에는 '학교이름에 먹칠을 하고 말았는지, 그의 행적을 대강만 살펴봐도 훤히 알 수 있다. 그가 해직되던 89년은 악명 높은 '교수채용제도'도 없었던 시절. 하지만 당시에는 그보다 악명 높은 군사정권이 있었다.

윤 교수의 해직은 그 군사정권과 무관하지 않다. 서울에만도 시위군중이 1백만명을 헤아리던 87년 6월, 윤교수는 군사정권의 퇴진을 촉구하며 +교수시국선언문을 작성, 발표했다.

그해 12월에는 이른바 '구로구청 사건'을 최초로 폭로했는데, 이는 당시 대통령선거 개표를 진행하던 구로구청에서 부정 투표함으로 추정되는 함이발견돼 시민과 전투경칠이 치열한 접전을 벌여 많은 시민이 상해를 입었던 사건이다.

그 함이 부정투표함이었는지 여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으나 윤 +교수는 당시 진압과정의 잔혹상을 폭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가 했던 일은 '구로구청 사건'의 정황을 담은 유인물을 2천장 남짓 만들어 뿌리는 데 그쳤으나 이 유인물이 수십만장이 복사되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고 한다.

서슬퍼런 공안정국 아래에서 언론이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하던 시절에 그는 신방과 교수 입장에서 독창적인 언론활동을 벌였던 셈이다.

그의 언론활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 역시 시민항쟁이 한창이던 +87년의 일이다. 윤 교수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회원들과 함께 모 일간지 편집국을 방문, 편파적인 보도행태를 항의한 바 있다.

또한 각 일간지와 방송국 기자들에게 공정보도를 촉구하는 유인물을 개인 +명의로 작성, 배포하기도 했다. 이뿐이 아니다. 89년 경에는 자신의 자가용에 전 대통령인 전두환 씨의 구속을 촉구하는 표어를 써 붙이고 +다니다가 수차례 경찰서에 끌려가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윤 교수는 이렇게 살아오는 동안 삶에 많은 손상을 입었다고 토로한다.

생활상의 어려움과 곤란도 만만치 않았지만, 무엇보다 가슴아팠던 일은 지난해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였다. 10여 년 전만 해도 아들이 교수라는 데에 자부심이 대단했던 어머니였다. 하지만 그 어머니가 마지막 가는 길에 본 아들의 모습은 '아무것도 아닌(?)' 상태였다. 불효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 때 그의 어머니는 주위의 권유에 따라 윤 교수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고 했었다. 누구보다 소신이 뚜렷한 그였지만 이 대목에서는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내가 정말 돌아버린 것이 아닐까'하고 진지하게 고민했었지요. 하지만 +내 결론은 간단했습니다. 어머니와 나의 관계는 물론 소중했지만 국가와 +나의 관계도 그에 못지 않았지요. 요행히도 지식인이 되었으니 지식인의 도리를 다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서울 서대문에 위치한 전공련 사무실, 그의 자리 뒤편에는 윤봉길 의사가 남겼다는 친필사본이 걸려있다. '대장부가 집을 나서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아버지의 육촌형님 되십니다. 제가 이런 삶을 고집하는 이유도 다 저분 탓이 아닌가 해요. 죽음까지 각오할 필요야 없겠지만 저는 계속 변방에 머물면서 대학사회의 각종 부정 부패를 척결하는 일에 앞장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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