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학신문 김정현 기자] “나는 운이 좋다.” 경력 단절 문제를 취재하면서 만난 여성 연구자 열에 아홉에게서 들을 수 있던 말이다. 연구실의 여성들은 출산을 한 당일에 연차보고서를 쓰고, ‘과학이 좋아서’ 밤새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최근 과학기술계에서는 경력이 단절됐다가 연구실로 복귀한 한 여성 연구자의 미담이 화제다. 그를 향해 박수를 치면서도 마음은 퍽 아쉽다. 그가 걸어온 노정은 그동안 취재한 여성 연구자들과 다를 것이 없다. 이들은 아홉시에 출근해 아홉시에 퇴근하는 ‘나인 투 나인(Nine to Nine)’ 관행을 넘어 며칠 밤을 꼬박 샌다. 출산·육아와 일을 병행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일자리를 찾지 못해 비정규직을 전전한다. 오직 과학이 좋아서 연구실에서 버티는 여성들은 연구에 몰두하는 것만으로도 운이 좋다고 말한다.

여성 연구자들이 운이 좋다고 느끼는 순간은 이 뿐만이 아니다. 실험 도중 슬쩍 어깨에 손을 올리는 사람이 없을 때. 위계를 강요해 연구 성과를 강탈하는 선임자가 없을 때, 법으로 보장된 출산휴가나 육아휴직을 배우자와 함께 마음껏 쓸 수 있을 때. 같은 일을 하는 만큼 같은 임금을 받을 때. 여전히 연구실에는 말 못 할 고민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여성이 적다. 이런 환경에 지친 여성들이 떠나면서 문화는 바뀌지 않는다. 연구현장의 경력단절은 구조적 문제다.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다. 경력단절에서 구출된 성과를 강조하는 자료를 많이 접한다. 하지만 경력단절을 조기에 막으려는 노력은 보지 못했다. 몇 달 전 만난 국책 기관 고위 관계자는 경력단절을 막으려는 정책은 없느냐는 질문에 “어쩔 수 없다”고 답했다. 정부뿐인가. 대학들은 출산한 여성 연구자들이 아이를 맡길 어린이집을 만들 공간도, 돈도 없다면서 의무를 방기하고 책임을 돌린다.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WISET)가 올 하반기 경력복귀지원사업을 통해 현장으로 복귀시킨 연구자는 총 186명이다. 동 기관 2015년 통계에 따르면 자연·공학을 통틀어 경력단절로 직장을 갖지 못한 여성은 29만7200명에 달한다. 복귀 지원만으로 경력단절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여성 연구자들이 오늘도 부닥치고 있는 구조적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 빛나는 성과에 취해 본질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저작권자 © 한국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