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계, 경제에 과학기술 종속 규정 헌법 127조 개정 요구

ESC, 25일 고려대서 헌법 127조 1항 개정 촉구 토론회

▲ 과학기술인 단체 ESC가 25일 고려대에서 헌법 127조 1항 개정을 요구하는 포럼을 열었다. 토론에서 발표하는 김호균 개헌특위 자문위 경제분과 자문위원(명지대 교수).(사진=김정현 기자)

[한국대학신문 김정현 기자] “국가는 학술 활동과 기초 연구를 장려할 의무가 있다”

변화를 위한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가 제안한 과학기술 관련 헌법 개정안 조항이다. 현행 헌법 127조 1항 ‘국가는 과학기술의 혁신과 정보 및 인력의 개발을 통하여 국민경제의 발전에 노력해야 한다’가 경제 발전을 우선시하고 과학 기술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는 지적이다.

사단법인 변화를 위한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는 지난 25일 고려대에서 ‘4차 산업혁명시대? 과학기술과 헌법: 헌법 제 127조 1항의 문제점 및 대안’을 주제로 공개 포럼을 열고, 현행 조항이 경제 발전에 과학기술이 종속되는 상황을 만들었다며 개정 필요성을 강조하고 과학기술계와 사회 각계의 관심을 촉구했다.

이날 ESC 포럼에는 헌법 개정 논의에 참여하고 있는 학자가 다수 참여해 이 같은 제안에 공감을 표시했다.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이하 개헌특위) 자문위원회 경제분과 위원인 김호균 명지대 교수(경영경제학), 장용근 홍익대 교수(법학), 국민개헌넷 정책자문단장인 한상희 건국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가 토론 패널로 참석했다.

■ 현행 헌법 127조, 왜 문제인가= ESC는 앞서 지난 23일 ‘헌법 개정에 대한 ESC의 제안’을 통해 △127조 1항에서 과학기술의 혁신을 경제발전의 수단으로 삼는 부분을 삭제하고 △조문을 신설해 ‘9장 경제’에서 ‘1장 총강’으로 옮겨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ESC는 이 글에서 “소위 4차 산업혁명을 언급하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헌법은 과학기술을 경제 발전의 도구로만 바라보고 접근하는 시대착오적인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며 “과학기술의 활용성은 다양하다. 하지만 우리 헌법은 경제 발전이라는 족쇄를 채워 관련이 적은 분야나 기초연구에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한다”고 비판했다.

▲ 현행 헌법은 과거 경제발전을 중시하던 시절 만들어진 이래 재논의 없이 현행 헌법까지 이어져 왔다. 김래영 ESC 헌법개정TF 팀장이 헌법 127조 1항 개정 필요성을 강조하는 기조 발제를 발표했다.(사진=김정현 기자)

해당 조문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집권하며 개정한 5차 개정헌법 118조 ‘국민경제의 발전과 이를 위한 과학기술은 창달·진흥돼야 한다’에서 출발한다. 국가 근대화를 위한 경제 발전을 최우선 방향성으로 뒀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이 조항이 87년 체제라고 일컬어지는 현행 9차 개정헌법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기조발표에 나선 김래영 ESC 헌법개정TF 팀장은 현행 헌법을 두고 “국가 주도로 과학기술 혁신을 한다는 관점은 정부 실패라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경제 발전은 과학기술이 갖는 잠재력 중 하나일 뿐인데, 근시안적 목적을 추구한다”며 “경제 발전을 목적으로 넣은 나라는 한국이 거의 유일하며, 과학기술을 헌법에 명시한 스위스, 스페인, 이탈리아조차도 장려 내지는 촉진의 관점에 머무른다”고 설명했다.

■ 개정 필요성 폭넓게 공감...“논의와 관심 필요”= 패널로 참석한 개헌특위 자문위원들과 법학자들도 개정 필요성에 공감했다. 김호균 자문위원은 “과학기술과 학문 관련 헌법 조항은 대외적인 국격의 문제”라며 다음 주 본격적 활동에 돌입할 예정인 국회 개헌특위를 비롯한 각계각층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상희 정책자문단장은 “과거 (과학기술을) 경제발전의 도구로 삼았던 것은 시대적 요구였으나 이제는 경제성장 제일주의를 벗어나 국민생활 향상과 공공복리 증진을 우선시해야 한다”며 “9장 경제라는 제호 자체를 바꾸고, 헌법에 과학기술을 명시한 세계 126개국이 열거하는 대로 과학기술을 지원 육성하도록 규정을 고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용근 자문위원은 “헌법은 정치적 영역이므로, 폭넓은 공감대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며 “기초과학이 우리 삶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 답해야 하며, 사회과학 등 타 학술 분야와 연결고리를 찾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제언했다.

▲ 경제 발전의 도구로만 과학기술을 바라보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관점이 과학기술계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임대식 과기혁신본부장이 25일 ESC가 주최한 헌법 127조 개정 포럼에 참여해 축사했다.(사진=김정현 기자)

과학기술계에서 헌법 127조에 대한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이전부터 나오고 있었다. 과학기술계 온라인 커뮤니티 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와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이 주관, 2280명이 참여한 지난 10월 설문에서는 “헌법 127조 1항의 수정이 필요하다”는 데 79%가 동의, 일부 동의 입장을 밝혔다.

임대식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과학기술혁신본부장도 이날 축사를 통해 “기초학문 분야가 상대적으로 소외돼 왔다는 데 공감한다. 과학기술이 경제 발전 말고도 사회발전을 위한 다양한 가치에 기여할 수 있다”며 “새로운 가치를 헌법에 담을 수 있다면 과학기술을 바라보는 국민들과 정치인들의 생각이 많이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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