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희 제주한라대학교 교수

1990년대 중반 일본으로 유학을 갈 당시 나는 일본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이 참으로 씩씩하게 일본으로 향했다. 당시 대단한 선풍을 일으켰던 전여옥의 《일본은 없다》를 통해서 일본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어 갔으며 이글이글 타오르는 애국심으로 무장한 나는 독립전사와 같은 비장한 적개심을 가지고 일본으로 떠났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그 순진무구함에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로부터 약 10년 뒤인 2000년대 중반, 제주로 삶의 터전을 잡기 위해 비행기를 탈 때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 제주는 대표적 몇몇 관광지 외에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었고 그 당시에도 역시 나는 제주에 대한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씩씩하게 짐을 꾸렸다. 젊었기에 가능한 일이리라. 당시 내가 알고 있던 제주는 어릴 때 유행했던 혜은이의 ‘감수광’을 통해 바람·돌·여자가 많다는 정도였으며, 대학 시절 접한 ‘4·3사건’을 통해 제주를 척박한 현실과 얼룩진 현대사의 상징으로 기억하게 된 것이 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뒤 ‘제주도 푸른밤’이라는 노래처럼 제주는 낭만과 휴식의 이미지가 만들어졌으며 아마 지금은 힐링의 아이콘으로서 그 절정에 이르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여행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적 분위기에 불과하며 제주의 실제 삶은 아닐 것이다. 인간이 살고 있는 곳은 어디나 삶의 희노애락이 공평하게 분배되기 때문이다. 얼마 전 뉴욕에서 모델 활동을 했던 한혜진이 관광지로서 뉴욕을 다시 찾고 나서 ‘그때는 생활이 너무 힘들어 뉴욕을 떠나고만 싶었고, 뉴욕이 이렇게 아름다운 곳인지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라고 하는 말을 듣게 되었다. 삶은 항상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봐야 아름답게 보이며 그 안에 있을 때는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몫이 무겁게 느껴지기 마련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제주로부터 시간적・공간적으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던 청년 시절에 제주는 ‘4·3사건’의 아픔을 지닌 곳이었으며 그 아픔을 딛고 일어선 것은 ‘해녀’로 대표되는 제주 여성의 강인한 생활력이라고 학습했다. 유교적 관념에 지배받는 우리 사회에서 어머니 세대가 겪어야만 했던 비천하고 종속적인 삶에 가슴 아파했던 나는 강인하고 주체적인 제주 여성이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제주 여성과 가까워지고 싶었으며 그들의 삶을 자세를 배우고 싶었다.

그러나 직장생활을 하며 바쁘게 지내는 나에게 제주 여성과 가까워질 기회는 그리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직장에서는 업무적 관계가 주를 이루기 때문에 인간적 교류라고 하기에는 부적절한 면이 있고, 동우회 활동을 할 만큼 일상이 여유롭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막내가 학교 들어간 이후에야 학부모 모임을 통해 지역주민과 일상적 교류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게 나에게는 신세계였다.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나는 친목도모의 학부모 모임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나이 서열이었고, 그 자리에서 ‘언니, 동생’ 관계가 맺어져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저녁반찬 정보부터 시작해 학원 정보와 홈쇼핑 알뜰 구매 정보까지 공유하며 서로의 삶에 침투해 들어갔다. 그런데 ‘곤밥(쌀밥) 먹은 소리’, 즉 서울말을 사용하는 내가 그들의 진한 제주 방언의 틈새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시간이 종종 있다. 자신의 의사 표현이 분명하고, 좋고 싫음이 확실한 제주 여성은 끈끈한 정으로 맺어졌다 하더라도 서로 간의 의사소통에 마찰이 생기면 화끈하게 관계도 정리하는 것 같다.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다름’으로 인정하기보다는 ‘옳고 그름’의 구분으로 생각하고 ‘내편과 네 편’을 나누어야 하는 한국인 정서가 극대화된 것처럼 보인다. 이것 또한 역사적 아픔을 가진 상처의 흔적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지만, 부지런하고 속정 깊고 강인한 제주 여성이 ‘나와 다른 너’를 포용하고 화합할 수 있다면 한국 여성상의 표본이 되지 않을까? 그러나 생각이 다른 이와 화목하게 지낸다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자세는 쉬운 듯 어렵다. 오늘밤 나부터 매사에 생각이 많이 다른 남편과 화이부동의 자세를 연습해야 할 것 같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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