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플린 총장 취임사 **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대단한 영광입니다. 먼저 취임사를 영어로 밖에 말할 수 없는 점을 사과드립니다. 이 문제가 하루 속히 해결되기를 바라마지 않으며 여러분께서 시간을 갖고 기다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나이께나 먹은 사람이 다시 학생이 되어 배운다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감안해 주시길 아울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많은 분들이 제게, 외국인인 제가 KAIST에서의 지금의 이 상황을 정말 이해할 수 있는지, 더더구나 앞으로의 진로를 제대로 파악할 수나 있을지 묻고 있습니다. 가장 간단한 대답은 현재의 상황이 그리 독특한 것은 아니란 점입니다. 연구중심대학이 처한 문제들은 그 본성상 역사적 맥락을 띠고 있으며 본질적으로 전 세계에 걸쳐 동일한 것입니다. 아주 똑같은 고민들이 스탠포드, MIT, 하이델베르그, 그리고 동경대에서 논의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의 문제를 풀기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제 자신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이에, 제가 이 대학에 대해 지닌 큰 꿈은, 바로 연구중심대학들에게 일반적인 것이기도 한데, 한 가지 일화를 통해서 잘 이해될 수 있습니다. 제가 그 일화를 말씀드리는 동안 참고 경청해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왜냐하면 길게 작성된 정책선언문보다는 한가지 성공사례가 오히려 더 들을만하다는 걸 알게 되실 것이기 때문니다. 저에겐 설리나스 밸리의 King City라는 마을에서 자란 삼촌이 있었습니다. King City란 이름은 어떤 왕도 그곳엔 가지 않을 마을이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었죠. 그곳은 소량의 목초류나 풍년이라야 겨우 옥수수류를 재배하기에 적당한 비가 내리던 먼지투성이의 잊혀진 농촌 마을이었습니다. 소규모의 영세한 농장들이 있었고, 몇 개의 구멍가게들이 있었고, 비포장도로도 있는 그런 마을이었습니다. 제 삼촌은 열심히 일했고, 꿈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King City를 떠났고 대학에 갈 결심을 했습니다. 그가 선택한 것은 성형목적으로 치아를 정돈시키는 치과의 한 분야인 치아교정술 분야였습니다. 그는 정말 잘 했습니다. 전쟁기간 동안 학업을 마친 그는 캘리포니아 리치몬드의 카이저 조선소 근방에서 개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업은 성공적이었고, 그는 굉장히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인과 네 명의 아이가 함께 살 집으로 동네의 가장 근사한 지역에서 아주 큰 집을 사게 되었습니다. 제 삼촌은 매우 실용적인 사람이어서, 자기 손으로 직접 일하는 걸 아주 좋아했습니다. 삼촌 집의 구조가 그랬던 것처럼, 그가 선택한 일들은 매우 실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의 지하실은 대단한 작업장이었습니다. 그곳에는 각종 금속제 장비들(선반들, 용접장비들, 나사 홈파는 기계 등), 목제 작업도구들(테이블 톱, 띠(벨트) 톱, 드릴 프레스(천공반) 등) 그리고 제도(설계)에 필요한 널찍한 공간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 작업장에서 아들을 위한 멋진 보행기, 가정용품, 선반가구 등 온갖 종류의 유용한 것들을 만들어냈습니다. 게다가 그는 손수 부엌까지도 리모델링하였고, 그게 워낙 전문가적 솜씨여서 나중에 집을 팔 때는 큰 이익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육체노동 중심적인 그의 일에 대한 관심은 결국 그가 진심으로 원한 것이 치과 일이 아니라 농업이었다는 흥미로운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이들이 고등학교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즈음에, 돈을 빌려서 새크라멘토(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주도) 북부지역에 땅을 샀습니다. 그곳에 천 그루의 호두나무를 심었고, 치과 일을 계속하면서 취미삼아 나무들을 돌보았습니다. 저는 직접 그 많은 나무들에 백색 도료를 직접 바르기도 했기 때문에, 나중엔 그 나무들에 대해 아주 잘 알게 되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 나무가 다 자라고 열매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수확철이 되자, 호두열매가 폭우처럼 쏟아지듯 떨어져 과수원 안을 걷는 게 위험할 정도였던 게 기억납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수확물은 눈에 띄게 불어났고, 그걸 크리스마스 프루트케익을 만드는 수 많은 회사에 팔기 위해 유럽으로 가는 배에 실기도 하면서, 그렇게 고생한 댓가로 엄청난 이익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호두나무 사업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심한 것은 그가 가진 땅의 비경작지 지역에서도 일을 벌일 결심을 하고는 목축사업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재정적으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 땅에는 캘리포니아 정부에서 무거운 세금이 매겨져 있어서 통상적으로 수익성 좋은 식용 암소를 키우기 불가능 했던 겁니다. 그가 문제를 해결해나간 방식은 그 땅을 큼지막한 네 개의 방목장으로 나누고, 철저하게 순서대로 물을 대주면서, 풀이 자라는 동안에는 소들을 목장 밖으로 내놓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했습니다. 이처럼 전략적인 물의 이용은 땅의 노동생산성을 증가시켰고, 결국 목축사업은 엄청난 수익을 창출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목축업 또한 그를 만족시키진 못했습니다. 제 삼촌은 항해를 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적당한 규모의 배를 샀고, 그걸 샌프란시스코 만에 정박시켰습니다. 그는 그 배와 바다의 조수가 엄청나게 크고 위험한 샌프란시스코 만에서 일하던 그 배의 선원들을 통제, 통솔할 수 있는 방법을 혼자서 배웠습니다. 그런 다음 하루는 배를 끌고 골든게이트 해협을 거쳐 바다로 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단지 바다로 나간다는 게 충분치 않다고 생각한 그는 항해법을 숙지한 후 멕시코를 다녀왔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고 하와이를 다녀왔고, 다시 그것도 성이 차지 않아 타이티도 항해하고 돌아왔습니다. 내 생각에 분명 그는 일본까지도 항해하고 돌아와 남은 여생을 넉넉히 살았을 수도 있지만, 인간이라면 그런 것처럼, 나이 먹고 약해진 뒤 끝내는 너무 쇠약해진 끝에 항해도 목장 경영도 더 이상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더욱 나빴던 건, 그가 파킨슨병에 걸렸다는 겁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것은 과수원에서 그가 쓰던 살충제 스프레이에 담긴 불순물 때문이 아니었을까 의심해봅니다. 그는 파킨슨병을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스웨덴에서 몇 차례 실험적인 뇌수술을 받는 등 가능한 수단을 동원해서 나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뇌수술로 더 악화되지는 않았지만, 성공적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인생의 말년에 이르러서도 결코 생각하는 걸 멈추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그는 세인트루이스 근처의 미시시피강이 대범람하던 해에는, 식용 소를 선물거래로 살 때라고 공공연히 말했습니다. 홍수가 지면, 사료공급이 제한되면서 여러 목장에서 가축도살을 일찌감치 하게 될 것이며, 그 과정에서 단기적으로 육류 가격이 낮아지지만, 장기적으로는 오르게 될 것이라 예견한 것입니다. 그의 말이 옳았습니다. 제 삼촌이 돌아가셨을 때, 우리는 삼촌을 그의 목장 가까운 곳에 있는 오크나무 아래 묻었습니다. 찬란한 봄의 아침 속에서 푸르른 풀들이 돋아나오고, 목초지의 도랑을 통해 사방으로 물이 흐르고 지평선 너머로 새스타 산에서는 하얀 광채를 뿜어내던 때였습니다. 그는 작은 단지에 들어있었습니다. 그의 아들은 작은 구덩이를 파고, 단지를 그 안에 넣었습니다. 이어서 그가 가장 좋아하던 도구 상자를 넣었습니다. 그 안에는 그가 가장 좋아했을 것이라고 가족들이 생각한 것들을 넣었고요. 못 박을 때 쓰던 망치와, 지루할 때 읽던 책, 가족 모두를 기억하게끔 그가 좋아했던 가족사진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런 다음 가족들은 그 구덩이를 조용히 채웠습니다. 그 사이 뒤에서는 깨끗하게 녹음된 블랙워치(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이루어진 영 육군 42 보병연대)의 파이프연주곡 ‘어메이징 그레이스’가 연주되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척 기뻐했을 겁니다. 살면서 남긴 하나의 흔적은 여러분의 친구와 가족들에게 당신을 떠나보내는 걸 진정으로 가슴 아프게 만듭니다. 이건 모든 장례식에 해당되는 사항이 아닌 것이죠. 식을 마치고, 타고 왔던 차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며 저는 지금은 판사가 된 그의 아들에게 삼촌은 내게 너무 훌륭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장례식은 견디기 힘든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삼촌 아들은 “네. 제 아버지는 훌륭한 분이었어요. 큰 꿈을 지니셨고, 그걸 이뤄낼 수 있는 힘을 지녔던 분이었어요.” 라고 답하더군요. 지금까지 너무나 긴 일화를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제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을 담고 있습니다. 이공계 대학에 종사하는 우리들 모두는 제 삼촌이 그랬던 것 같은 신성한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러한 큰 꿈을 지녀야 하고 그것을 이뤄낼 힘을 찾아내야 한다는 유일한 목적으로 이 자리에 서있는 것입니다. 대학 생활이란 것은,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경제적인 측면에 속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힘과 재원의 뒷받침이 없는 현재의 원대한 선언문이 종종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그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원칙에 대한 선언문을 발표하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선언문은 제가 어디에서 왔으며, 또 여러분 모두가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게 무엇인지를 분명하고도 간결하게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해왔던 것을 말씀드린다면, 제 할 일은 한가지로 귀결됩니다. 여러분의 꿈이 충분히 크다는 걸 확신시키고 따라서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 교직원과 학생 여러분- 이 그 꿈을 일궈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걸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제가 할일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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