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스비어와는 ‘조건부 합의’, 결렬된 DBpia 등과는 ‘자율 계약’

업체들 비대위 재협상 결렬되자 대학들 개별 접촉
타 해외 DB사 계약 만료 임박…연내 재발 가능성
“정부 재정지원 확충, 학계 차원의 목소리 낼 필요”

[한국대학신문 김정현 기자] 대학들과 업체들 사이의 논문 구독권 재협상이 종료됐다. 앞서 대학들은 업체들의 가격 인상에 저항하고자 보이콧을 시작했지만, 엘스비어(Elsevier)와 조건부 합의를 맺은 것 외에 실질적인 소득을 얻지 못했다. 국내 업체들은 재협상 테이블에 나오지 않고 보이콧에 참여하지 않은 대학들과 차례로 계약을 체결했다.

19일 한국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와 한국대학도서관협회(대도연) 전자정보 컨소시엄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는 디비피아(DBpia)를 운영하는 누리미디어, 키스(KISS)를 운영하는 한국학술정보(주)와의 재계약이 최종 결렬됐다고 밝혔다.

비대위는 18일 각 대학 도서관에 이들 국내 업체와의 계약 체결 지침을 담은 공문을 발송했다. 개별 대학들이 업체들과 계약을 체결할 때 업체들에 구독료 인상 세부 조건이 부당하다는 점을 지적하도록 당부했지만, 사실상 개별 대학들의 자율에 맡긴 것이다. 보이콧도 오는 30일에 종료된다. 이와 함께 이들 업체들을 공정거래위원회에 불공정 거래행위로 제소하는 것을 검토하는 등 후속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태스크포스팀(TFT)를 꾸린다.

아울러 앞서 10일에는 사이언스다이렉트(Science Direct)를 운영하는 국제 출판사 엘스비어와의 조건부 합의를 맺었다. 양 측은 구독료 인상률에 대해서는 합의했으나, 끝내 합의를 이루지 못한 원문공개(오픈액세스, OA) 학술지에 대한 구독료 환불 등에 대해서는 공동 TFT를 꾸려 대안을 마련하기로 하고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사이언스다이렉트 구독료는 대학들이 올 한 해만 계약할 시 3.9%가 인상된다. 중도 해지가 불가한 3년 계약을 체결하는 경우 올해 3.5%가 오르고, 2019년 3.6%, 2020년 3.7%가 차례로 인상된다. 당초 엘스비어가 제시한 인상률 4.5%보다 낮아졌지만, 기타 조건에 대해서는 1년의 시간을 버는 데 그쳤다.

▲ 지난 15일 한국대학도서관협회가 각 대학에 발송한 엘제비어 사이언스다이렉트 구독 계약 재개를 안내하는 공문 중 일부. (자료=대교협)

재협상 기간 동안 대학들은 대열을 이탈해 나갔다. 누리미디어는 비대위 재협상에 응하지 않고 지난 1일부터 대학들을 개별적으로 접촉해 협상을 진행했다. 당초 70여곳에 달하던 구독 정지 대학 수가 현재 27개까지 줄었다. 재협상 기간 동안 구독을 연장한 한국학술정보(주) 측도 “15일부터 구독을 차단한 대학은 20여곳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지난달 대교협-대도연 컨소시엄이 실시한 엘스비어와의 계약 보이콧에 동참할 지 여부를 묻는 설문조사에 대학 75%(98개)가 응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비대위는 국내 업체들에게 서면으로 입장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으나, 업체들은 9일 비대위에 “보이콧에도 불구하고 계약, 연결을 요청한 기관과의 신뢰를 훼손할 수 없다”며 협상 거부 뜻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아울러 콘텐츠 유실 내지는 이용률 하락이 있더라도 지속적으로 가격을 인상해 나갈 것이라는 의사를 굽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대학가에서는 도서관과 협의체를 중심으로 한 보이콧 운동의 한계점을 지적한다. 한 과학기술원 도서관 관계자는 “모 대학이 독자적으로 구독을 중지한 적이 있으나, 교수들과 학생들의 피해가 심각해 오래 가지 못했다. 이용자들이 협조하지 않으면 어려운 싸움”이라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러나 학술단체들도 보이콧에 선뜻 나서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학술지 발행과 운영비를 지원하는 교육부(한국연구재단)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이하 과총)의 보조금이 있지만 한계가 있다. 이런 상황에 국내 DB 업체들이 학계 발전 명목으로 지원하는 학술지 발행비, 학술단체 홈페이지 제작 등을 선뜻 뿌리치기는 난망하다.

민간 DB사들은 출판하는 학술지의 권위를 높이거나, 권위가 있는 출판지와 독점 계약을 체결하고서 품질 개선을 위해 구독료를 매년 인상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R&D 투자 여건을 근거 삼기도 한다. 전용수 엘스비어 한국지사 사장은 “네덜란드 본사에서는 해당 국가의 경제적 상황과 연구개발(R&D) 투자 비율을 하나의 근거로 두고 인상률을 정한다”고 설명한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 R&D 예산 비율은 2014년 기준 1.14%(17조8000억원)로 OECD에서 가장 높다.

이는 대학에 속한 연구자들에게도 대형 DB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독점’ 환경을 조성한다. 학계 권위지에 논문을 내거나, 권위자들의 논문을 읽지 못하면 연구 동향을 쫓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도서관 관계자들에 따르면, 일부 연구자들은 보이콧에 나선 대학 측에 "DB 접속이 안 된다"며 항의를 하기도 한다.

이 같은 상황을 개선하지 않으면 이번 사태가 재현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비대위에 따르면 엘스비어에 준하는 국제 출판사 A사의 구독 계약이 올해 말로 만료된다. 반면 대학 도서관의 자료구입비 예산은 매년 줄어 2016년 대학 운영비 총 예산의 0.75%에 그치고 있다. 총액 2418억원 중 전자저널 구독료만 1563억원이다.

구독료가 치솟는 데 대해 외국은 원문공개(Open Access, OA)를 늘려나가는 추세다. 특히 국비 보조금이 집행된 연구개발 성과는 모두에게 공개해야 한다는 원칙이 세계적인 추세로 굳어가고 있다. 미국은 2015년 '과학기술연구 공정접근법(FASTR)'을 의회에서 가결시켜 국비가 투자된 연구 성과의 온라인 무료 공개를 법제화했다.

한국은 현재 학술진흥법 등에 유사한 근거가 마련돼 있으나, 이 또한 교육부가 투자한 연구 성과에 한정한다. 과기정통부 쪽 과제 결과물은 관련 법규가 마련돼 있지 않다.

한국연구재단이 등재(후보)지 제도를 운영하면서 한국학술지인용색인(KCI)에 논문 공개 여부를 평가 지표로 활용하지만 이들 중 원문 공개된 논문은 58만2323편(41.3%)이다. 과총도 원문공개 플랫폼인 ‘사이언스센트럴’을 운영하지만, 논문을 등재해도 인센티브가 주어지지는 않는다.

이우창 전국대학원총학생회협의회(전원협) 정책위원(서울대 박사과정)은 “한국은 정부에서 학술 DB를 사실상 민간에 내맡긴 구조다. 원문공개 공공 DB를 제대로 만들고, 대학원생들과 시간강사 등 학계가 이를 뒷받침하는 활동을 할 필요가 있다”면서 “업체를 완전히 몰아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상식선을 지켜달라는 요구조차 못하는 게 지금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대교협과 업체들은 정부재정지원도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일례로 대만의 경우 엘스비어의 전자정보 구독권을 대학 등 기관이 이용할 수 있도록 연 300만불을 지원한다. 이 같은 ‘국가 라이센스’ 정책을 시행하는 곳은 프랑스, 네덜란드 등이 있다. 업체와 학계의 상생 모델을 찾자는 취지에서다.

황인성 대교협 조사분석팀장은 “학술지 DB를 분석해서 사용하는 대학의 수가 많고, 구독 금액이 크지 않은 경우 전액 국고지원으로 보게 할 수도 있다. 국가가 30%를 내고, 대학이 70%를 내면 효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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