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스케치] 헌책방과 딸기시폰케이크
[마음스케치] 헌책방과 딸기시폰케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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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 광주보건대학교 교수
▲ 김미 광주보건대학교 교수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소꿉친구와 전화로 수다를 떨다가 여행도 할 겸 서로 살고 있는 중간 지점에서 만나기로 했다. 여기저기 장소를 물색하다가 새해가 지난 며칠 후 KTX가 정차하는 조그만 소도시에서 만났다. 중년의 여자들이 만나면 흔히 하는 “어쩜 하나도 안 변했니, 그대로다” 등의 인사치레를 하고 편하게 수다를 떨 카페를 찾다가 헌책방 하나를 발견했다. 군 단위보다 조금 큰 시골 도시 한복판에 생뚱맞게 남아 있는 헌책방은 신기하게 다가왔다. 어렸을 때부터 같이 만화방을 다니고 대학 때는 청계천의 헌책방을 다니던 추억을 공유하고 있어 우리는 자연스럽게 헌책방으로 들어갔다.

확실히 헌책방에는 일반서점에서 느낄 수 없는 독특한 향기가 있다. 활자와 종이는 물론 먼지마저 어우러져 오랜 시간만큼의 진득한 냄새를 만들어내는 향기가 잠시 현기증을 일으키게 했다. 들어오는 입구는 좁았지만 꼬불꼬불 길게 이어져 있는 책 사이의 길은 마치 다른 시간으로 연결돼 있을 것 같았다. 요즘 시공을 초월해 전생의 연인을 만나는 드라마 탓인지 책 사이의 길을 지나가다 보면 나의 유년시절과 학창시절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젊은 시절 그렇게도 열광했으나 지금은 잊고 지냈던 책들이 그득하다. 중·고등학생 시절 밤을 새우며 보았던 캔디, 베르사이유 장미 등의 순정만화, 영혼까지 맑아질 것 같은 이해인 수녀의 시집,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로 시작한 접시꽃 당신이 눈에 띄자 가슴이 뭉클해졌다. 대학시절 또래 남자동기들이 사족을 못 쓰던 이현세 작가의 야구만화를 보자 당시 남자 주인공이었던 까치를 닮았던 동기가 생각났다. 맨 위에 우리 시대의 지적 허영심을 채워주던 <창작과 비평> 잡지가 구색을 맞추듯 줄을 서있는 것을 보니 타임머신을 타고 40년 전쯤으로 날아가 그 당시 묻어놓았던 타임캡슐을 하나하나 봉인 해제하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한참을 머물다 현실로 돌아오니 구석 한편에 조는 듯 무심하게 앉아 있는 주인장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책방의 먼지 두께만큼이나 연륜이 쌓여 보이는 할머니는 이 책방에서 아이들 네 명을 키웠다고 한다. 큰 아들이 처음에는 같이 하다가 지금은 혼자서 자리를 지킨다고 했다. 손님도 없고 춥고 유지비용만 나갈 텐데 굳이 왜 서점을 계속 하시느냐는 질문에 지금 이 시간은 학생들이 하교를 안 해서 그렇지 조금 있으면 학생들이 온다는 의외의 답을 하셨다. 그러고 보니 추억이라는 마법에 걸려 미처 보지 못한 다른 한편의 책들이 눈에 띈다. 아직 비닐이 벗겨지지 않은 신간 참고서나 쓸 만한 중고참고서는 물론이고 요즘 인기 일본 만화책과 인터넷에서 인기 있는 신간만화책들이 전시돼 있었다. 헌책방이라는 간판 때문에 처음에는 보지 못했던 중고생이나 젊은 층 고객들 입맛에 맞추고 있는 책들이 있었던 것이다. 시내 한복판에 덩그러니 헌책방이 살아남아 있어 주인장 할머니가 추억을 찾고 싶은 손님과 온라인에서 인기 있는 책을 찾고 싶어하는 젊은 청소년을 이어주고 있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마침 중학생 몇 명이 들어와 우리는 책을 한 권씩 사가지고 서점 문을 나섰다. 편하게 수다를 떨 카페를 찾다가 잠시 헌책방의 마법에 걸린 기분이다. 조금 떨어진 곳에 빈티지풍의 북카페가 보였다. 예전에는 서점이었다 변신한 북카페는 모던과 내추럴이 합쳐져 아직 헌책방의 분위기에 취해 얼떨떨한 우리에게 잘 로스팅돼 풍겨 나오는 커피의 향기로 행복감을 안겨주었다. 딸기시폰케이크가 제일 맛있다는 친절한 아르바이트 학생의 안내에 커피와 딸기시폰케이크를 앞에 두고 친구와 함께 할머니 헌책방에서 산 책을 여유롭게 읽다가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하는 등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헤어졌다.

열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창 밖으로 순정만화를 보며 사랑을 꿈꾸던 10대, 이상과 현실의 모순에 아파했던 20대, 직장 다니며 아이들 키우고 공부하면서 쩔쩔매던 30대, 40대, 여러 명의 내가 그리운 사람들과 함께 지나간다. 그리고 다가올 새로운 일과 변화되는 나를 기대해보기로 한다.

몇 년쯤 지난 후에 다시 헌책방에 들러 주인장 할머니를 만나고 북카페의 딸기시폰케이크 앞에서 커피향을 맡으며 스스로에게 말하고 싶다. 잘 살아왔다고…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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