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실 (본지 논설위원/한국교육개발원, 교육정책학자)

근래 우리 사회에서 드러나고 있는 무수한 부조리, 결함, 오류, 곡해 등은 20세기 미국 문화형성에 막강한 영향을 끼친 ‘호밀밭의 파수꾼’을 떠올리게 한다.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팽배해진 미국인의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출세 지향적이고, 물질 만능적인 삶의 양식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저항의 몸짓이 요즘 우리나라 현실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 단어인 ‘가짜’가 판치는 세상에서는 의미 있는 소통이 불가능해 사회 불신과 인간 소외가 발생하므로 기술과 경제가 발전할수록 함께 증가하는 불확실하고 복잡한 위험요소에 대처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상생의 생태계 구축이 불가능하게 된다.

가장 기본적인 인간 욕구에 대응하는 정치와 경제는 말할 것도 없고, 종교ㆍ교육ㆍ문화ㆍ예술 등 거의 모든 영역에 가득 찬 허위와 가식은 공동체를 파괴하고, 정책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유발한다. 특히 선진사회에서 겉모습 뒤에 숨은 어두운 실제 행태가 유발하는 일상적 위험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영국에서는 외로움을 사회전염병으로 간주하고 ‘고독 담당 장관’을 임명하는가 하면, 일본에서는 ‘간병이직 제거’를 경제정책의 목표로 삼고 적극 대응하고 있다. 자타가 공인하는 대학 진학률 1등, 자살률 1등의 경쟁지향 국가인 우리는 어떻게 위험사회에 대응해야 하는가. 지금 이 시점에서 절실한 것은 사회 각 분야에서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숙제와 성숙한 미래사회로 전진하기 위한 핵심적인 과제에 대한 성찰적 논의와 치열한 토론을 거쳐 합의하고 방향성 있는 융합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변화와 혁신은 제도와 인식이 만나는 접점에서 일어난다. 우리 사회는 2차 산업혁명기까지 누적된 학습결손을 만회하기 위해 잠도 덜 자고 앞뒤 돌아볼 틈 없이 경주마처럼 달리고 달려, 넘어지고 부딪혀도 제대로 치유도 못한 채 건너뛰고 돌진해 상처 많은 영광이지만 비교적 세계에서 손꼽히는 출세국이 됐다.

이 과정에서 교육분야를 돌아보면 ‘교육이 세상을 바꾼다’는 전통적 신념으로, 교육혁신에 매진해 수없이 많은 교육개혁을 단행했다. 그 결과 과잉 교육정책에 따른 개혁피로도와 교육정책의 일관성ㆍ지속성 부재가 늘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세간의 비판은 교육이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는 교육수요자들의 교육목표가 명문대학 진학이라는 사실이 바뀌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이다.

바뀌지 않은 것은 제도라기보다 그 제도를 움직이는 다양한 정책이해당사자의 표리부동이고, 이를 공고히 해온 익숙한 관행이다. 문제를 밝히면 의외로 문제해결의 단초는 쉽게 찾을 수 있다. 어떻게 하면 묵인된 관행타파를 시작할 수 있는가? 바로 크든 작든 조직문화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리더의 환골탈태로부터 새롭고 창의적이고 개방적인 조직문화 구축이 시작돼야 한다. 평생학습사회에서 지식미흡으로 잘못 가르치는 것보다 더 해가 되는 것은 자신의 교과를 싫어하게 만드는 교원이고, 지능정보사회에서 가장 나쁜 리더는 문제 제기자와 문제 야기자를 구분하지 못하고, 익숙한 관행과 결별하지 않으며, 못 뺀 자리에 도로 박아야 안심이 되는 자다. 심지어 못 뺀 자리의 상처에 둔감한 문화를 만드는 대표, 총장, 사장, 원장, 위원장, 국장 등등의 폐해는 상상 이상이다.

질서와 안정이라는 구호 아래 위선과 기만 속에 살며 갖가지 관행을 수단으로 미래를 향한 진보와 자유정신을 억압했던 당시 기득권 집단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떠올리며 작가가 세상을 향해 외친 말을 되새기고 다짐해야 할 것이다.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다가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것이야.” 그래, 결심했어! 호밀밭의 파수꾼처럼.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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