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자이슬러 지음 안진이 옮김 ≪페미니즘을 팝니다≫

페미니즘이 전성기를 맞이했다. 한때 사람들이 기피하는 단어였던 페미니즘은 이제 패션, 영화, 연예인의 도움으로 새로운 브랜드로 변신했다. 최근에 페미니즘은 남성을 혐오하는 여성들의 공격적인 운동이라는 과거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세련되고 재미있는 이미지로 탈바꿈하고 있다. 

페미니즘 문구는 티셔츠부터 스마트폰 케이스, 에코백 등 온갖 상품에 멋스러운 상표처럼 등장한다. We Should All Be Feminists(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Girls Can Do Anything(여자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Girls do not need a prince(소녀에게 왕자는 필요 없다)와 같은 문구가 새겨진 상품에 소비자들은 높은 호응을 보인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는 페미니즘 액션 영화라고 알려지면서 좋은 흥행성적을 거두었고 엠마 왓슨, 비욘세, 김혜수, 문소리처럼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연예인들도 늘어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성차별적인 현실을 그린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동시대 여성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페미니즘은 여성들의 성폭력 피해 사실 공개운동인 미투(#Me too) 운동이 확산되며 사회적으로도 큰 관심을 얻고 있다. 2017년 가을 할리우드 제작자의 성범죄 파문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검찰과 문단 내 성추행 사건에 관한 잇따른 폭로가 불씨가 되어 최근에는 문화, 연극계로 확산되었다. 
이런 페미니즘 열풍은 페미니즘이 어느 정도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는 증표로 볼 수 있을까? 미투 운동 동참자가 늘어나는 현상은 여태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여성들이 그나마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까? 우리는 이것을 페미니즘의 진보라고 볼 수 있을까?

대표적인 페미니즘 잡지≪비치(Bitch)≫의 창간자인 앤디 자이슬러는 페미니즘의 대중화를 두고 페미니즘의 비약적 발전이라고 이야기하는 반응에 냉정한 시선을 던진다. 20년 넘게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영화나 TV 프로그램, 광고를 탐구하며 글을 써왔던 사람으로서 그녀는 페미니즘이 사람들을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영역은 대중문화와 대중매체라고 생각했다. 

시대가 바뀌어 페미니즘이 뮤직비디오, 샴푸 광고, 패션쇼, 잡지, 드라마 등의 화려한 주류 문화에 인기 있는 아이템으로 부상했다. 심지어 매니큐어와 에너지 드링크, 향수, 생리대 등 온갖 상품에서 ‘페미니즘적’이라는 표현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페미니즘은 어느새 멋지고,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자리매김했다. 페미니즘의 대중화는 페미니스트라면 누구나 바라 마지않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앤디 자이슬러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만큼 세상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페미니즘은 돈이 되면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이미지만 남고, 지향하던 가치와 투쟁은 사라져버렸다. 대중의 입맛에 맞춰 변형되면서 정작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이 박힌 불평등은 외면되었다. 상업화된 페미니즘은 사회에 만연한 성폭력과 남녀 임금 격차, 육아 휴직 등 우리를 불편하고 거북하게 하는 복잡한 문제는 파고들지 않는다. 

앤디 자이슬러는 이 책에서 페미니즘이 상업적으로 포장되고 이용되는 과정을 예리하게 파헤치고, 대중문화와 대중매체를 통하면서 본래의 의의가 어떻게 변질되고 퇴색되는지 보여준다. 여성 상위시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여권이 높아진 듯 보이지만, ‘남성과 여성의 동등한 권리’라는 아주 기본적인 의제를 예전보다 더 자주 언급해야 하는 실상을 꼬집는다.

이 책은 최근 벌어지고 있는 페미니즘 물결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페미니즘 정의나 역사적 계보를 다루는 입문서가 아니다. 페미니즘에 대한 여러 오해와 편견을 바로잡는 안내서도 아니고, 여성이 일상적으로 겪는 성폭력과 성차별을 폭로하는 책도 아니다. 이제는 더 이상 페미니즘을 정의하고 선언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페미니즘 운동의 성과라고 착각할 수 있는 작금의 페미니즘 열풍을 재검토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자고 촉구하는 책이다. 저자는 독자에게 언론에 화려하게 보이는 페미니즘과 현실과의 간극을 냉철하게 보여줌으로써 페미니즘의 현주소에 관한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완전한 평등을 위해 페미니즘을 어떤 방식으로 지속시켜야 할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세종서적 / 1만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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