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관 의의 되찾고 도전하는 ‘싱크탱크’ 만들 것”

“과학기술은 보험” 연구자 중심 정책 힘 실어야
“국가 연구개발 정책, 관리 중심 사고 벗어나야”

▲ 조황희 STEPI 원장.(사진=STEPI)

[세종=한국대학신문 김정현 기자] 세종시 국책연구단지 B동 6층에서는 여느 대학 도서관에 뒤지지 않는 열기가 느껴졌다. 적막한 복도를 지나면 문틈으로 정책 현안을 논하는 목소리가 새나온다. 지난해 12월 26일 취임한 조황희 원장이 이끄는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의 모습이다. 끈을 고쳐 맨 한국의 과학기술 정책 ‘싱크탱크’가 새 도약을 꿈꾸고 있다.

정부출연기관법에 의거해 설립된 STEPI는 국가 차원의 과학기술 정책을 수립하고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하지만 지난날 “책무를 수행하는 데 적극적이지 않다”는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했다. 27년간 STEPI를 지켜온 조황희 원장은 취임 즉시 조직을 개편한 것을 시작으로 기관 개혁과 내실 다지기에 주력하겠다고 밝혔다. 국가 과학기술 발전에 도움이 되는 정책을 마련하고, 기관의 발전에 헌신하는 구성원들을 더 이상 소외시키지 않겠다는 의지다.

주요 요직을 거치며 정책 입안에도 관여해온 ‘정책통’인 그는 지금이야말로 국가 연구개발 정책의 패러다임을 ‘연구자 주도’로 바꿔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과학기술 연구개발의 한 축인 대학에 대한 고민도 엿보였다. 부처와 기관의 칸막이를 넘어선 종합적인 과학기술 정책 마련에 나설 각오다. STEPI가 조직을 개편한 지 2개월을 맞은 3월 28일 조 원장을 집무실에서 만났다.

▲ (사진=STEPI)

Q. 쓰임새 있는 싱크탱크로 거듭나겠다는 개혁 의지를 밝힌 배경은.

“지금까지는 ‘싱크탱크’로서 정책 역량을 결집하기보다 당장의 먹고사는 문제에 내몰리기 급급했다. STEPI도 연구원들의 인건비를 확보하기 위해 수탁 연구를 해야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구성원들은 각자의 주제에만 전념하고, 기관은 국가적 과제의 본류에서 멀어졌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기관의 존재 가치가 줄어들 것이다. 과학기술 정책의 주류에서 멀어지게 되는 건 아닌가 위기감이 들었다.”

Q. 조직을 개편했는데 다음 개혁 과제는 무엇인지.

“인사고과 시스템을 손보려 한다. 지금까지는 수탁 과제를 많이 가져오고 보고서를 많이 쓰면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 보고서의 품질이나 STEPI의 설립 취지에 부합하는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앞으로 제도 개선을 통해 구성원들 사이에 팀워크를 활성화하고, 국가적으로 쓰임새 있는 과학기술 정책연구에 도전하도록 돕고자 한다. 보고서의 활용도가 높아질수록 기관의 존재감이 살아날 것이다.”

Q. 연구기관으로서의 대학은 국가 연구개발의 한 축이다. 대학을 혁신할 정책도 필요한데, 관심 가는 분야가 있는지.

“산학협력단에 대한 실태조사가 필요하다. 교수님들을 만나면 산단 운영에 대한 문제들을 많이 지적한다. 하지만 데이터와 팩트가 부족하다. 전수조사를 한 뒤 문제점을 파악하고 개선사항을 도출하는 기초적인 작업부터 해야 한다. 대학혁신을 위해 보다 큰 문제들도 있다. 국가 연구개발의 한 영역으로서 기초과학의 시대적 역할과 과제를 정의하는 문제, 한국을 구성하는 지식인 사회의 주류로서 대학사회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주제는 STEPI 단독으로 풀어가기 어렵고, 지식인 사회의 폭넓은 집단지성이 요청된다.”

Q.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하는 고등교육은 어떻게 해야 할까.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한다며 대학들이 ‘융합교육’을 강조하는 추세다.

“구호보다 내실이 더 중요하다. 미국의 대학이 왜 강할까. 새로운 학문을 창출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학문이 나오면서 그에 맞는 사람들의 일자리와 연구 분야가 생겨난다. 전문가들의 협업으로 이뤄지는 것이 바로 융합이 아니겠나. 우리는 학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따라하기’에 급급하다. 지식의 생산 과정에서 자연스레 전문성이 높아지고 융합이 이뤄진다. 이를 위해서는 대학이 자율성을 가지고 대학사회가 새로운 지식의 생산에 몰입하도록 유인하는 정책이 있어야 한다.”

▲ (사진=STEPI)

Q. 연구 현장에서는 연구자들의 발목을 잡는 불합리한 정책들에 대한 비판이 여전하다. 연구과제중심제도(PBS), 대학원생 인건비 제도, 성과 중심의 단기적인 과제 평가 등이 도마에 오르는데.

“현장에서 중요하다고 보지만 그렇다고 정부에 세부적인 제도를 일일이 바꾸게 하는 것도 함정에 빠지기 쉽다. 즉흥적인 투약은 어느 조직이든 독이다. 한발 빼고 자율성을 주고 바라봐주다가 필요한 부분만 손을 대면 된다. 문제는 지엽적인 부분보다 연구개발 패러다임의 혁신이다. 연구비를 배분하는 방식 자체를 손봐야 할 시점이다.”

Q. 연구개발 정책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선진국은 연구개발 사업을 시작할 때 기획 단계가 길다. 장기적으로 신중하게 추진한다. 그리고 기획을 믿고 장기간 투자한다. 우리는 반대다. 기획은 짧고 관리가 길다. 예컨대 인공지능 계획을 세운다는데 6개월 만에 요구한다. 한국도 관리에 집중하는 기존의 정책을 바꿔야 한다. 기술 발전은 예측이 불가능하고 빠르다. 무엇보다 선진국과의 경쟁에 집중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국내에서 안정적으로 연구개발비를 확보하는 데 너무 많은 자원을 소모한다. 연구자 자율성을 인정하는 연구개발문화가 필요하다.”

Q. 정부가 연구자 중심을 기조로 5개년의 4차 과학기술기본계획을 발표했는데, 정책의 향후 방향을 어떻게 해나가야 할까.

“연구자 자율성을 존중하는 측면은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이제 국가경영에 과학기술이 녹아들도록 해나가야 한다. 미국은 전 세계를 경영할 목적으로 과학기술을 연구한다. 일본도 세계대전에서 패한 뒤 국가적 목적을 갖고 과학기술을 바라본다. 정책을 상상하는 크기가 담대하다. 우리는 기술을 개발해 새 기업체가 몇 개 나왔나 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새로운 계획이 세계 과학기술 발전의 향방을 바라보면서 한국 과학계를 이끌어갈 비전으로 기능하길 기대한다.”

▲ (사진=STEPI)

■ 조황희 STEPI 원장은...
1962년생. 1984년 전남대 공업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 KAIST에서 산업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5년 일본 도쿄대 객원연구원으로 연구하며 일본어에도 능하다. 1990년부터 STEPI에 재직하며 산업혁신연구부장, 기초과학인력팀장, 혁신정책연구센터장, 기획조정실장, 부원장을 역임한 ‘정책통’이다. 1998년 과학기술부 국가과학기술장기계획 기획위원을 시작으로 2003년 과학기술부 장관자문관, 2015년부터 현재까지 국가과학기술심의회 공공‧우주전문위원회 위원을 맡는 등 정부 정책 입안에도 활발히 참여해 왔다. 저서로 《따뜻한 기술》, 《자연에서 배우는 청색기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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