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하영 서울시여성가족재단 연구위원·교육학 박사

장면 하나.
최근 독일 소재의 세계적 연구기관 막스플랑크 연구소를 비롯한 유수의 유럽 과학기술연구기관들은 여성과 외국인에게 특별히 더 많은 채용의 기회를 주기 시작했다. 혁신을 위한 탁월함(top talent)을 위해서라면 다양성과 새로움이 가져다주는 도전은 ‘게임을 바꾸는’ 멋진 실패로 포용하겠다는 포부를 내세웠다.

장면 둘.
근래에 우리가 접했던 항공우주국(NASA)을 소재로 한 영화들은 멋들어진 과학기술의 성취를 통해서 인간이 달을, 화성을, 우주를 정복한 이야기를 다루지 않는다. NASA에서 우주를 향해 어떤 것들을 쏘아올리고 세상을 향해 무엇을 내보였는지의 문제에서 눈을 안으로 돌린다. 영화 ‘히든 피겨스’(필자는 이것을 ‘가려진 영웅들’로 번역하고 싶다) 의 경우는 달 탐사선을 쌓아올리는 NASA에서 당시에 컴퓨터를 대체하는 전산원, 인간 연산기계로 일하던 흑인 여성들을 보여준다. 이들은 더없이 우수해도, 허락된 범위 밖에서는 그 가능성을 펼쳐보일 기회가 없었고, 결과적으로 NASA는 자신들이 보유한 탁월한 인재들이 우주 프로젝트에 기여할 통로를 스스로 닫아버렸다.

장면 셋.
그렇다면 지금의 과학기술계는 어떠할까. 2016년 기준으로 한국 과학기술연구개발분야 여성보직자 규모는 8.6%에 그친다. 세계적으로 가장 심각한 임금차별과 여성관리자 부재라는 문제를 안고 있는 한국사회 전체 평균이 20%라는 점에 비춰봤을 때도 슬픈 현실이다. 연구를 기획하고 추진하는 실무자도 다를 것은 없다. 2016년 기준으로 과학기술연구개발기관의 여성 연구과제 책임자 비율은 8.8%에 불과하고, 여기 해당하는 40대, 15년 경력 이상의 여성인재 중 경력단절에 처한 여성이 56.3%에 달한다. 다른 분야에 비해 능력주의(meritocracy)가 철저히 보장될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기대됐고, 그러다보니 과학기술계 내부에서는 여성의 진출을 보장하는 적극적 조치는 이뤄지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 과학기술계가 절대적으로 더 많이 ‘기울어진 운동장’이 된 현실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

한국의 여학생들은 이제 초중등학교 시절에 높은 학업성취를 보이고, 시험과 선발로 이룰 수 있는 성취에서는 남성에 비해 앞서고 있다는 현황자료가 가득이다. PISA 2015년 결과 수학ㆍ과학영역에서 이미 여학생과 남학생 간 유의미한 차이는 없어졌고, 부분적으로 더 높게 나오기까지 했다. 하지만 한국 여학생의 이공계 진학비율은 30% 정도 수준에 머무르고, 그중에서도 공학계열 여학생 비율은 17.6%에 그친다. 경쟁과열의 시대, 높은 선발과 합격의 문을 열고 들어선 그 많던 알파걸들, 이공계 여학생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과학기술에서 여성주의와 다양성, 불평등을 이야기하는 것에서 위화감을 느끼는 이들이 있다. 혹자는 과학기술이 그 객관성과 엄밀성을 위해서 가치중립적이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과학의 본질이라 함은 혁신과 확장 그 자체가 아닐지 모르겠다. 과학철학에 중요한 업적을 남긴 토머스 쿠퍼는 "과학은 이런 것이며, 이래야만 한다"는 규범적인 내용을 좇았을 때 당면했던 패착을 알렸다. 과학은 늘 “모든 천체가 지구를 돈다”는 것과 같이 ‘자명한’(것처럼 보이는) 게임의 법칙을 뒤집는 짜릿함이 있는 저항과 전복의 역사를 만들어왔다. 과학을 소금에 비유한다면, 소금을 소금 되게 하는 ‘짠맛’은 곧 변화와 혁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이 아닐까 싶다.

이공계 실험실에는 오늘도 많은 여성 학부생, 대학원생, 박사후과정 연구생들이 실험을 하고 계산을 하며 연구에 참여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들은 경력단절, 공동체 내 성폭력, 직장 내 차별로 사라진다. 그렇게 ‘빛나는 과학기술 성취’까지 다다르지 못한 이들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고, 이들의 손길은 놀라운 성취가 탄생했던 그 실험실의 실험기구와 같이 취급됐다.

여성뿐만이 아니다. 장애인, 비과학인, 과학기술을 사랑하는 대중은 그간 과학의 언저리를 맴돌았다. 필자가 소속돼 있는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 역시 이러한 다양성을 지향하는 포용과 확장의 시도에 앞장서고 있다. 영문학을 전공하고 교육학과 여성학을 연구하는, 그야말로 ‘문과 중의 문과’인 필자를 과학기술계의 미래에 대해 함께 이야기할 판을 깔아주고 한바탕 고민하고 토론하며 놀 수 있는 마당에 불러준 것이다. 웃기도 하고 떠들기도 하는 즐거운 신학이 불가능하던 ‘웃음이 금지된’ 중세교회 (영화 <장미의 이름으로>)가 어떻게 타락하고 몰락했는지를 생각해보자.

여성신학자이자 ‘여신’ 현경은 “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라고 말했다. 우리 안의 불안함과 나약함을 치유하고 극복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아름다움, 세상에 편재한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발견하고 자라나게 하는 것이라고. 여성과 장애인, 다름의 이름을 가진 이방인들을 철저히 배제한 채 발달해 온 신학과 윤리는 결국 그들을 안에서 곪게 했다.

나는 과학기술이 세상의 소금이 돼주기를 바란다. 여성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과학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에게 부여하기를 소망한다. 나아가 과학기술계가 기왕 팔을 넓게 벌리는 김에, 여성뿐 아니라 더 다양한 소수자를 품어안을 것을 제안한다. LGBTQ로 대표되는 성적소수자를 비롯, 장애인, 청소년, 비과학인을 모두 ‘주류 과학기술계’의 무대에 초대하는 즐거운 축제를 열기를 기대한다. 

저작권자 © 한국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