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논문 7개 불과 …특별법 개정으로 학술연구 활성화해야”

제주대 학술조직 연구비도 연구자도 ‘빈곤’
4‧3평화재단-제주도청 책임 떠넘기기 ‘눈살’
기존 연구진 고령화…“신진연구자 길러내야”

▲ (사진=제주특별자치도)

[한국대학신문 김정현 기자] 현혜경 제주연구원 제주학연구센터 연구위원은 2008년 전남대에서 <제주4‧3사건 기념의례의 형성과 구조>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내 대학이 배출한 두 번째 '4·3 박사'다. “박사논문을 쓸 때만 하더라도 주변에서 4‧3 주제로 논문을 쓰면 (정치적) 낙인이 찍히거나 직업을 구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을 종종 들었다.” 그의 대학원생 시절 회고다. 이미 2003년 정부가 진상조사 보고서를 펴낸 이후였는데도 편견은 여전했다.

3일 제주4‧3이 70주년을 맞았다. 2003년 10월 정부가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확정했지만 아직 못 다한 과제가 남아있다는 게 학계의 지적이다. 하지만 이를 견인해야 할 학술 생태계는 빈곤한 상황이다.

특히 신진연구자 배출도 없다. 국내 박사학위 논문은 지난 2012년부터 나오지 않고 있다. ‘1호 박사’인 2006년 성균관대 양정심(현 대진대 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 박사 이후 7개에 그치고 있다.

4‧3평화재단 아카이브와 한국교육학술정보원(KERIS) 학술연구정보서비스(RISS) 등에서 찾을 수 있는 관련 논문은 1988년부터 지난해까지 총 176편이다. 이 중 학위논문은 41건에 불과하다. 1998년~2011년 사이 발표된 논문이 대부분(78%)으로, 2012년 이후부터는 매년 한 자리수를 넘기지 못하고 있다. 학맥(學脈)이 단절돼 가고 있다는 방증이다.

▲ 4.3의 추가 진상조사를 위해 연구해야 할 과제가 산적하지만, 진상조사 보고서가 발표된 2003년(빨간 네모)을 전후한 시점을 지나 2012년부터는 예전만 못한 상황이다. 박사학위자도 2006년 1명, 2008년 2명(빨간 별, 2010년은 제주대 첫 박사학위자) 등 7명에 그치는 상황이다. (정리=김정현 기자)

하지만 제주도 내 각 연구주체는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제주대는 연구비 가뭄과 연구자 부족의 악순환에 고심하고 있으며, 제주특별자치도청과 제주4‧3평화재단은 책임을 서로에게 돌리기 급급하다.

제주대 4‧3 연구조직은 평화연구소와 탐라문화연구원 내 제주4‧3연구센터가 있다. 하지만 전임교원은 없고, 마땅한 연구비 지원도 없다. 제주대 사학과의 유일한 근현대사 전공 전임교수인 양정필 제주4‧3연구센터장은 “저 자신도 4‧3으로 박사를 받은 연구자가 아니다. 5년 전에는 (제주대 내에) 근현대사 교수도 없었다”며 “대학 바깥에서 요구하는 만큼 학문적 역할을 수행하는 데 미흡한 것이 사실”이라고 털어놓았다.

이어 그는 “80년대 민주화 정국에서 제주대 학생들이 4‧3의 진상을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했지만, 이후 연구자를 생산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실”이라며 “연구원이나 교원을 초빙하기에도 연구비가 부족한 것은 물론, 4‧3으로 현대사 박사학위를 받은 이가 전국에 한두 명에 불과하다. 남은 연구자들도 50,60대로 고령화되고 있다”고 토로했다.

▲ 제주대 전경.

제주4·3평화재단은 2015년부터 연구논문, 학술총서를 공모하고 지난해부터 학위논문으로 지원을 확대했지만 지금까지 수혜를 입은 이는 3명에 불과하다. 제주4·3평화재단 관계자는 “몇년째 예산을 다 쓰지 못해 반납하는 상황이다. 지원하는 사람이 없다”며 “신진연구자 양성은 대학에서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상설연구조직이 없어 사업 확대에 한계가 있다”고 책임을 돌린다.

제주4‧3평화재단의 설명대로 이 학술진흥사업은 기념사업의 일부분에 그치고 있다. 지난 2015년 원희룡 제주특별자치도지사는 지속적인 추가 진상조사와 미신고 희생자 및 유족 파악을 위해 제주4‧3평화재단에 연구조직을 신설,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아직 지켜지지 않고 있다. 인력과 예산이 부족한 게 첫째이고, 그 다음으로 대학과 제주특별자치도, 민간연구소와의 협의가 필요하다는 게 제주4‧3평화재단의 설명이다.

제주특별자치도 당국은 제주4·3평화재단에 책임을 돌린다. 제주특별자치도청 4‧3지원과 관계자는 “국비와 기금이자만으로 운영되는 5.18기념재단과 달리 도에서 운영비 50~60억원을 추가로 지원한다”며 “예산은 매년 남긴다면서 인력이 없다는 것은 의지가 없다는 것 아닌가”라고 되묻는다.

더 나아가 도는 2012년부터 2016년까지 15억604만원을 들인 추가진상조사도 끝났지만, 4·3평화재단은 여전히 보고서도 내지 못한다면서 ‘직무유기론’을 꺼내든다. 제주4‧3평화재단 측은 “70주년 추념식이 마무리된 뒤 보고서 작업을 본격화, 하반기까지 결과물을 내놓겠다”고 해명한다.

▲ (사진=제주특별자치도/4.3진상조사보고서자료)

연구 주체들이 책임을 돌리는 것은 4‧3 연구의 주체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도청 관계자는 현행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4‧3 특별법) 개정을 통해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연구 진흥을 위해 예산을 집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국회에는 현재 3건의 4‧3 특별법 개정안이 발의돼 있다. 이중 권은희 바른미래당 의원, 오영훈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개정안에 의하면, 정부가 기념사업 명목으로 4‧3과 관련한 연구, 교육을 위해 예산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새로 들어간다. 신진연구자들을 연구활동으로 유도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특별법의 개정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BOX] "진상규명은 끝나지 않았다" 4·3 연구의 과거와 오늘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이하 정부 보고서)가 나온 지 15년이 지난 지금, 4·19, 5·18, 6·10은 민주화운동으로 공인됐지만 4·3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정부 보고서는 4·3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경찰, 서북청년단의 탄압에 의한 저항과 단독선거, 단일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 2003년 고건 당시 국무총리가 정부 진상조사 보고서를 발표하는 모습. (사진=제주특별자치도/4.3진상조사보고서 자료)

고건 당시 국무총리는 “4·3사건 전체에 대한 성격이나 역사적 평가는 후세 사가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고 보고서 서문에 적었다. 당시 진상조사단은 희생자와 경험자들의 명예회복과 신원회복을 우선시했다.

4·3은 양민학살 사건인가, 민중항쟁인가. 4‧3의 ‘정명(正名, 이름 바로잡기)’은 학계와 사회 속에서 아직 '뜨거운 감자'다. 

4‧3을 ‘민중항쟁’으로 본 첫 논문은 박명림(현 연세대 정치학과 교수)의 1988년 석사학위 논문 <제주도 4‧3 민중항쟁에 관한 연구>를 시발점으로 꼽는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건설과정에서 발생한 권력의 형성과정, 주체, 그리고 행사방법이라는 요소가 얽힌 총체적 관점에서 4‧3을 다뤘다.

각계의 진상규명 노력에 4‧3을 바라보는 관점도 다각화됐다. 1975년 존 메릴, 1981년 브루스 커밍스의 연구에 이어 민간 연구소인 제주4‧3연구소가 주한미군의 당시 보고서와 미 국무부의 문서를 발굴해 미국의 책임론을 수면 위로 부상시켰다. 

▲ 1948년 5월 5일, 4.3사건 처리를 위해 제주도에 간 미 군정 및 국방경비대 요인들. 맨 오른쪽이 김익렬 9연대장. 9연대는 1948년 11월부터 중산간마을에 대한 초토화 작선을 수행하며 가옥 95%(3만9285동)을 불태우고 주민 2만명을 산으로 내몰았다고 진상조사보고서는 기록하고 있다.(자료=제주특별자치도/4.3진상조사보고서)

여전히 일각에서 5.10 단독선거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4‧3 무장폭동론’을 제기하나, 이는 잘못이다. 2003년 확정된 정부의 보고서는 전체 희생자 78.1%가 당시 이승만 정권 군‧경 토벌대에 의해 살해됐으며, 특히 10세 이하 어린이와 61세 이상 노인이 11.9%을 차지했다는 점을 밝힘으로서 공권력에 의한 양민학살 책임을 물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보고서가 발표되기 직전인 그 해 10월 제주를 찾아 정부를 대표해 처음으로 공식 사과했다.

이제는 진상규명의 노력을 통해 트라우마를 치유해야 한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4·3이 남긴 상흔은 누군가의 죽음에서 끝나지 않았다. 1981년까지 시행된 연좌제로 인해 ‘대문이 없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던 제주도 공동체는 큰 상처를 입었다. 발전이 더딘 동쪽과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중산간마을 도민과 다른 지역 도민간의 갈등이 예다.

현혜경 연구위원은 ‘정명’ 논의가 대의명분을 바로 잡아 실질을 바르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며 “폭동이냐 항쟁이냐가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 사건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합리적 설명을 찾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념이 아니라 사람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해봐야 한다는 설명이다.

▲ (사진=제주특별자치도/4.3진상조사보고서자료)

2013년 제주대 평화연구소가 펴낸 《제주 4‧3연구의 새로운 모색》은 4·3의 ‘완전한 해결’을 위한 연구 과제를 던지고 있다. 지역적인 틀을 뛰어넘어 보편성을 얻기 위한 이론적 쟁점 규명, 국내 정치집단과의 역학관계 확인, 국제적 차원의 비교연구, 사회심리학적 분석, 구술채록이다.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조명기 교수는 “국가폭력을 겪은 동남아, 대만 등 다른 도시들과의 평화공존, 그리고 4·3으로 이민을 떠난 재일 제주도민과의 국제적 연대를 통해 4·3을 세계화해야 한다”고 제언하기도 한다. 제주만의 문제가 아닌 ‘제노사이드(Genocide, 집단살해)’라는 관점에서 보편화를 통해 공동체의 치유를 이뤄내야 한다는 것이다.

연구를 위한 기초자료 수집도 시급한 상황이다. 정부 진상조사위원회는 2006년까지 1만1069건의 자료를 수집했지만, 당시 미군정이 생산한 기록물 등 새로운 자료의 발굴에는 미진하다는 평가다. 구술을 채록할 생존자도 해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제주4·3생존희생자 후유장애인협회에 따르면 생존희생자는 105명, 평균 연령은 85.8세다. 정부가 확정 발표한 희생자 수만도 1만4232명, 유가족은 5만9426명에 달한다. 이들에 대한 실질적 지원도 과제로 꼽힌다.

▲ 정부의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군·경 토벌대는 소개를 이유로 제주도민들을 강제이주시키기도 했다. (자료=제주특별자치도/4.3진상조사보고서)

현혜경 연구위원은 “4·3과 같은 대규모의 학살 사건은 적어도 3세대에 걸쳐 영향을 미치므로, 지속적이고 장기적으로 진상규명을 해 나가야 한다”며 “정치적 담론의 역학관계 속에서 진상규명을 논하기보다는 실체적 계획을 수립하고 수행해 나가야 한다. 진상규명운동이 지속적으로 활성화 될 수 있도록 문화예술운동, 학문적 운동을 통해 다음 미래 세대에게도 연결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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