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기 (본지 논설위원/광주교대 교수, 한국교원교육학회 수석부회장)

나름대로 열심히 설명했는데 학생들이 이해하지 못할 때 가르치는 사람은 좌절하게 된다. 그런데 다시 설명해도 학생들이 잘 이해하지 못한다면 학생들의 준비 부족이나 무관심에 화를 낼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 자신을 돌아볼 필요도 있다. 가르치는 사람이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을 가르치려고 하거나 ‘지식의 저주’에 걸려 있을 때 학생들의 이해를 돕기가 어려워진다.

아인슈타인이 한 이야기 중 “여섯 살짜리에게 설명할 수 없다면 아직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내가 완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할 때는 상대에 맞는 언어로 상대가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하기가 어렵다. 설익은 음식을 먹으면 소화시키기 어려운 것처럼 가르치는 사람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가르치면 배우는 학생이 제대로 배우기 어렵다.

가르치는 사람이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으면서 학생들을 가르칠때 학생들이 이해를 잘하지 못한다면 가르치는 사람이 ‘지식의 저주’에 걸려 있을 가능성이 있다. 지식의 저주란 아는 것이 많아지고 많은 정보를 가진 전문가가 될수록 일반인이나 학생들에게 설명할 때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을 상대방도 알고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데서 발생한다. 우리 뇌는 자신이 선명하게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으면 상대방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잘 보고 들을 수 있을 거라고 가정한다. 내가 알고 있으면 상대도 알고 있을 거라고 우리 뇌는 착각을 하게 된다. 히스와 히스(Heath & Heath, 2007)는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뉴턴(Elizabeth Newton)이 1990년에 실시한 노래맞히기 실험을 예로 들어 이 현상을 설명한다.

뉴턴은 한 집단은 노래의 리듬에 따라 탁자를 두드리게 하고 다른 한 집단은 그 리듬만 듣고 노래 제목을 맞히는 게임을 하게 했다. 실험은 ‘생일 축하합니다’ ‘반짝반짝 작은 별’ 등 미국인이 거의 다 아는 아주 쉽고 익숙한 노래 120곡을 대상으로 했다. 실험 실시 전에 리듬 두드리는 집단에 다른 사람들이 몇 곡이나 맞힐 거라고 예상하는지를 물었더니 절반 정도는 맞힐 것 같다고 예상했다. 하지만 맞힌 곡 수는 평균 3개(2.5%)에 불과했고, 그것도 거의 찍어서 맞히는 수준이었다. 노래의 리듬에 맞춰 책상을 두드리는 사람은 자신이 곡명을 알고 있으므로 상대도 쉽게 알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고 한다. 이와는 조금 다르지만 우리가 하는 놀이 중에 비슷한 것이 있다. 단어를 보고 몸으로 표현하면 상대가 그 단어를 알아맞히는 놀이다. 그 단어를 알고 있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놀이 상대방이 알아맞히지 못할 때 아주 답답함을 느낀다. 하지만 막상 자신이 알아맞혀야 할 때는 알아맞히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음을 경험하게 된다.

지식의 저주에서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 또래집단이다. 어떤 것을 새롭게 이해한 아이는 자신이 무엇을 몰라서 그동안 이해가 어려웠는지를 아직 기억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친구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알아 도울 수 있다. 또래 튜터 프로그램이 효과가 있는 이유다. 명의가 맥을 제대로 짚어낼 수 있듯이 학생들이 어려워하는 부분을 제대로 짚어낼 때 최고의 교사가 될 수 있다. 맥을 잘 짚기 위해서는 명의가 오랜 수련과정을 거치듯이 교사도 많은 경험을 필요로 한다. 만일 지식의 저주가 없다면 지식 전문가가 곧 교육 전문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식의 저주를 포함해 가르침과 배움에 관련된 뇌의 다양한 특성 때문에 지식 전문가와 교육 전문가는 서로 다른 유형의 전문가로 인정받는 것이다.

가르치는 사람이 완벽하게 알지 못하면 당연히 가르치기 어렵다. 그러나 안다고 해서 잘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직도 대학과 중등학교에는 잘 알면 잘 가르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지식의 저주에 걸려 있는 교사, 교수가 있다. 자신이 생각할 때 아주 쉽고 확실한 것인데도 학생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나면 자신이 지식의 저주에 걸린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지식의 저주는 가르침의 길목에 서 있는 사람들이 내용 지식 탐구만이 아니라 배움의 원리와 가르침의 원리에 대해 끝없이 탐구하는 ‘영원한 학생’이 돼야 하는 이유가 된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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