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호숙 본지 논설위원/사이버한국외대 학장

시대의 전환기가 도래하면 으레 입담이 센 사람들이 등장해 세상을 휘젓는가 보다. 

그리스시대 아테네에도 그런 때가 있었다. BC 5세기 후반, 그리스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막대한 부와 문화 유입 등 사회 내부에 큰 변화가 일어나 백가쟁명의 시대를 맞이했다. 이런 사회적 환경에서 출현한 게 소피스트(Sophist)들이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다방면에 박식한 만물박사’다. 그런데 위대한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들을 향해서 탁상공론을 일삼는 궤변론자라고 비판했다. 

일본의 대표적인 교육사상가였던 후쿠사와 유키치도 에도시대 말기에 막부의 존폐를 놓고 심한 다툼이 있자 “입만 살고 사람의 마음이 전혀 없는 자들을 대량으로 만들어낸 것은 학문 자체에 책임이 있다”며 교육과 출판에 힘을 쏟았다. 어수선한 요즘의 세상 분위기 탓인지 우리나라에서도 몇몇 방송프로그램을 통해 등장하는 현대판 소피스트들의 대중을 향한 립 서비스가 현란하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국제관계, 남북문제 심지어 예능분야에 이르기까지 이분들의 입담이 안 닿는 데가 없다. 만물박사도 이런 만물박사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잘못된 정보로 인터넷을 달구는 경우도 많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적대로 자칫 대중을 오도할 위험성이 적지 않다.

우리는 지금 상상했던 일들이 현실이 돼가는 세상에 살고 있다. AI(인공지능), 나노기술의 획기적 발전, 범지구적으로 깔린 정보화 인프라 구축 등 기술 진보의 여파가 우리 생활 구석구석까지 도달하고 있다. 여태껏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했던 일들이다. 자동번역기 기능이 획기적으로 진화돼서 국가 간 언어의 장벽도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여기에 인공지능 기능이 첨가되면서 글로벌 소통시대가 열리게 될 날도 머지않았다.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한 정보를 구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온라인과 SNS를 통해 전 세계에 널려 있는 정보를 얼마든지 손쉽게 취할 수 있다. 이쯤 되면 누구나 만물박사가 되는 일은 식은 죽 먹기다. 

국제질서도 격변기를 맞이하고 있다. 미·소 냉전체제 붕괴 이후 고착화됐던 미국, 서방 세계 중심의 세계질서에 중국과 러시아 등 구 사회주의권 세력들이 30여 년 만에 권토중래를 꾀하면서 노쇠해진 서방국가들을 상대로 리턴매치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나라 또한 급격한 변화의 물결이 사회 곳곳을 휩쓸고 있다. 보수와 진보를 아랑곳하지 않고, 남성과 여성 사이에 가로놓여 있던 높은 젠더의 장벽을 깨면서, 지역과 계층을 뛰어넘어 낡고 오래된 구체제에 대한 청산과 개혁의 목소리가 드높다. 게다가 그동안 오랜 세월 경색됐던 남북한 간의 관계에도 전면적인 변화의 물꼬가 트일지 초미의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이런 변화는 이제 막 시작일 뿐, 그 종착역이 어디일지 아무도 모른다. 

대내외적 환경이 일대 격변기를 맞이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 사회는 위기요소와 기회요소를 동시에 안고 있다. 짙게 낀 안개 속을 항해하는 선박에 노련한 조타수가 필요하듯이, 자기분야에 정통한 실사구시(實事求是)형 인재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방송 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해 유명세를 타는 얕은 지식의 만물박사보다는 자기 분야에 정통한 인재들이 한데 모여 지식이 융합되고 정보가 공유돼서 집단 지성이 발휘될 수 있는 통섭(統攝)의 공간을 마련해 나가야 한다. 혼돈의 시기에는 단독 플레이어의 위험한 독주보다는 통섭의 공간을 통해서 형성된 집단 지성이 사회의 안전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교육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시대적 흐름에 맞는 인재 양성에 힘을 쏟아야 한다. 더 이상 “대학교육에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평가는 받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국대학신문>

저작권자 © 한국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