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희 제주한라대학교 교수

▲ 이종희 교수

가끔 잠 못 드는 밤이 있다. 이튿날 수업이 꽉 차 있는데 늦게까지 잠이 안 오면 다음날 걱정에 더 뒤척이게 된다. 책이라도 읽으려고 하면 신경이 곤두서고 눈도 침침해서 여간 피곤한 게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리모컨을 잡고 텔레비전을 켠다.

‘이웃집 토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으로 유명한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가 앞치마 차림으로 담배를 피우며 커피를 끓이고 있었다. NHK에서 은퇴 이후 그의 삶을 밀착 취재한 프로그램이었는데, 그의 모습은 왠지 초조하고 불안해 보였다.

동료나 제자의 한 치의 잘못도 용납하지 않는 그의 엄격함, 혹은 깐깐함에 많이 이가 주변에서 떠나가고 한적해진 스튜디오 지브리. 은퇴 선언은 했으나 그곳에서 그는 단편 애니메이션 ‘애벌레 보로’ 제작에 여념이 없었다. 만약 자신의 오른쪽 어깨뼈를 끓이면 시꺼먼 물만 나와 수프를 만들 수 없을 거라고 농담을 하고, 셜록 홈스가 자신의 시신을 보면 바로 직업이 애니메이터라는 걸 알 수 있을 거라며 평생을 그려온 오른쪽 어깨의 통증에 대해 에둘러 이야기한다. 거장의 초조함은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남겨진 시간은 별로 없고, 젊은 시절만큼 작업을 할 체력은 떨어졌으나 작품에 대한 열정과 애정은 식지 않았다. 그것이 그를 약간 불안정하고 신경질적으로 보이게 했다.

결국 주변의 설득으로 젊은이들로 구성된 CG팀이 단편 애니메이션 제작에 합류하게 된다. 평생을 손그림만 주장했던 노장(老壯)이 새로운 세상과 타협하기 위해 일보 후퇴했으나, CG는 마술램프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애벌레 ‘보로’가 알에서 깨어나 세상을 관찰하는 첫 장면의 목 움직임이 영 신통치 않다. 미야자키는 알에서 갓 깨어난 보로가 세상과 대면할 때, 경이로움과 아기스러움이 어우러져 표현돼야 한다고 한 치의 양보 없이 계속 수정을 요구했고, 그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한 CG팀의 팀장은 과도한 스트레스로 결국 병원에 실려가고 만다. 털 하나의 움직임과 그 길이의 세심한 차이를 고민하는 천재의 모습이 그곳에 고스란히 담겨 있고, 그의 그런 고집스러움과 완벽을 추구하는 고통스러운 열정이 애니메이션 문화의 획을 긋는 대작을 만들어낸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그가 추구하는 완벽은 다른 이와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완벽이 아니라, ‘쓰레기를 만들고 싶지 않다’는 자신의 예술적 욕구로 인한 것으로, 처절한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우리는 AI 기술이 도입되는 한없이 편리한 세상에 살고 있고, 요즘 젊은 층의 트렌드는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이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생각하면 손그림의 섬세함을 주장하고 밤낮없이 작품을 고민하는 그의 행보는 확실히 구시대적이다. 그러나 역사와 문화와 문명의 대전환기에는 인간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 치열함과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열정이 더욱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런 에너지들 덕분에 우리는 진화하고 있을 것이다. 범인(凡人)은 그들의 치열한 노력의 결과물을 누릴 수 있음에 새삼 감사할 뿐이다.

운전면허 갱신을 위해 면허장을 다녀온 미야자키는 그곳에서 만난 노인들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그들의 모습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난날 함께했던 스태프들은 하나 둘 이 세상을 떠나간다. 그는 초조하다. 아무것도 안하고 죽음을 기다리느니, 애니메이션을 만들다 죽겠다며 그는 마지막이 될 장편에 다시 도전한다. 그리고 불과 얼마 전 가족과 같은 50년 지기 다카하타 이사오의 죽음 또한 맞이했다. ‘빨간머리 앤’ ‘엄마 찾아 삼만리’ 등을 만들고 ‘미래소년 코난’을 함께 만든 동료다. 그는 더욱 초조할 것이며, 그에게 남겨진 시간은 범인(凡人)의 것과 밀도와 농도가 다를 것이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소중한 이유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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