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 광주보건대학교 교수

▲ 김미 교수

해마다 추위가 물러나면 겨우내 입었던 옷들을 세탁소에 보내고 철 지난 옷들의 위치를 바꾸는 게 큰 숙제다. 이 일이 꽤 귀찮아 미루고 미루다보면 결국 여름이 다 될 즈음에야 떠밀리듯 하곤 한다. 그런데 올해는 4월의 끝자락에 옷장 문을 열었다. 다른 해보다 제법 이른 셈이다. 그렇게 시작한 옷 정리가 마무리될 무렵 갑자기 교복 한 무더기가 눈에 띈다. 유난히 자신의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둘째 아이 것이다. 험하게 옷을 입은 탓에 해마다 맞춘 교복으로 서랍이 가득 채워져 있다. 한 달 전 군대에 가면서 차마 정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알 수 없는 짠함이 밀려온다. 조금은 의젓했던 큰애를 군에 보낼 때보다 그 정도가 훨씬 크다. 서둘러 한 옷장정리가 일찍 찾아온 더운 날씨 때문이 아님을 비로소 깨닫는다. 마냥 철없던 막내아들 생각에 내 스스로 많이 허전했던 모양이다.

둘째는 큰애가 초등학교 3학년 다닐 때 태어났다. 지금 같으면 흔한데 당시에는 병동에서 제일 나이 많은 산모여서 조금 머쓱했다. 태아의 콩팥에 물이 차있어 대학병원으로 가라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고 가슴 졸이며 분만을 했다. 갓 태어난 신생아의 혈관에서 피를 뽑을 때 새파랗게 질려 울던 아이의 모습에 같이 울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다행스럽게 시간이 지나면서 콩팥은 정상으로 돌아왔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아이는 건강하게 자랐다. 집안의 어른들은 출근하는 엄마를 둔 늦둥이 손자가 안타까워 손에서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도록 해주셨다. 그래서인지 초등학교 4, 5학년 무렵에는 흔히 말하는 비만아가 됐다. 어른들은 “살은 다 키로 간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우연히 간 병원의 의사선생님 말은 달랐다. 고도 비만은 키를 안 크게 하고 남성호르몬 분비를 멈추게도 할 수 있다고 충고했다. 온가족을 동원해 체중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모든 식단과 일정이 아이의 다이어트에 맞춰졌고 매일 저녁 아파트 공터에서 줄넘기를 했다. 비 오는 날에는 주민들 눈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파트 1층 로비에서 줄넘기를 했다. 대부분 잔소리를 동반한 강제적인 행위였음에도 군소리 없이 잘 따라와줬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둘째는 끊임없이 체중과 전쟁을 했다. 많이 먹었다고 생각하면 스스로 운동을 하고 체중을 조절하는 모습이 나는 참 기특하다.

큰아들과는 달리 사소한 것도 잘 말하던 아이가 언젠가부터 말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학교생활을 물어보자 “왜 이런 거까지 알아야 해! 내가 알아서 할게!” 라고 말대꾸를 한 적이 있다. 갑자기 마음 한 축이 와르르 무너지는 절망감이 느껴졌다. 화가 나 있는 엄마에게 언제 그랬냐는 듯이 주위를 빙빙 돌면서 엉뚱한 말을 시키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고등학교 때는 학원에 데려다주던 시간이 길었다. 가끔은 시간에 쫓겨 운전하는 엄마에게 살갑게 김밥 하나씩을 떼어 내밀곤 했다, 오래된 가요나 팝을 듣고 운전하고 있으면 제가 좋아하는 아이돌 노래를 들려주면서 엄마의 의견을 묻곤 했다.

그 어리던 아이는 이제 훌쩍 어른이 돼버렸다. 9년 전 큰아들이 입대하고 가족이 면회 갔을 때, 큰애에게 동생 면회는 네가 가야겠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그 꼬맹이가 입대를 한 것이다. 신병 훈련소에 아이를 두고 오면서 자꾸 붉어지려는 눈시울을 보이지 않으려고 계속 차창 밖을 보면서 돌아왔다. 이윽고 아이가 입고 간 옷과 배낭, 신발, 안부 편지가 왔고, 신병교육대 카페에 단체 사진이 올라와 잘 지내고 있음을 확인하기도 했다. 수신자 부담 전화를 받고 직접 목소리도 들었다. 겨우 조금 마음이 편해진다.

낡은 교복을 보는 순간 처음 떠오른 것은 그리움이다. 모든 희로애락의 순간들이 그립고 그립고 또 그리워진다. 터울이 많은 탓에 첫아이를 키우면서 경험한 시간들이 둘째를 통해 반복되면서 그리움이 쌓여간다. 한때 여러 가지 일로 그리움이 커지는 것이 나이와 비례하는 거 같아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있다. 앞만 보고 살겠노라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나이와 비례하는 그리움은 자연스러운 이치임을 깨닫는다. 멈추지 않는 삶의 무상함 속에서 그리움을 갖는 것은 너무나 인간적인 현상이다. 그리움은 삶에 대한 애정이고, 그리움 속에서 자신을 성찰하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 사랑할 수 있게 될 것 같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교복정리를 포기하고 서랍 미닫이를 닫는다. 언젠가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아들과 같이 해야겠다. 그 또한 먼 훗날의 그리움이 될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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