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열 고려대 연구기획팀장

A단과대학 건물에 있는 어느 한 강의실 손잡이가 파손됐고 이런 시설물의 수리 업무는 본부의 B부서에서 담당한다고 하자. 손잡이 수리를 위해 A단과대학의 담당자는 B부서에 전자문서로 요청을 하고, B부서는 내부에서 결정해 수리를 해주거나 다른 결정을 할 것이다. 이 행정 절차는 별로 흠잡을 데 없이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전체적·시간적 맥락으로 행정의 변화과정을 살펴보면 달리 보일 수 있다. 또한 이처럼 작은 일 하나에 몰입해보면 행정의 큰 구조를 엿볼 수도 있다. 그것은 작은 일 하나하나가 모여 전체 행정 구조를 이루고, 마치 프랙털처럼 그 각각의 작은 일의 구조가 행정 전체의 큰 구조와 서로 닮아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작은 일을 앞에 놓고 몇 가지 관점에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① 지원업무가 통제업무로 역할이 전도되지 않았는가? 그렇게 되면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체계가 타율과 통제된 체계로 전환된다. 강의실 손잡이 수리가 원래 B부서의 업무라고 한다면 B부서는 파손된 사실을 최대한 빨리 인지하고 수리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그렇다면 A가 B에게 문서로 요청하는 절차는 불필요하다. 하지만 이 행정 절차로 어느 순간 B가 A의 요구를 들어줄까 말까 하는 통제적 위치가 돼버렸다. 이것은 소비자가 휴대폰 수리를 위해 서비스센터를 방문했는데 공문서로 수리요청을 하라고 하는 것과 같이 이상한 일이다. 만일 이러한 방식으로 서비스센터를 운영하는 회사가 있다면 그 회사는 소비자로부터 외면당할 것이다.

② 통합적으로 관리돼야 할 업무가 분산되지 않았는가? 그렇게 되면 조직의 전문성과 자원의 효율성이 떨어진다. 본부부서가 통제방식으로 업무를 계속하다 보면 손잡이 수리업무도 결국 A부서에서 떠안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같이 대학본부 지원업무가 분권화라는 명목 하에 단과대학으로 이관되는 현상은 행정 전반에 걸쳐 발생한다. 이는 본부부서가 지원보다 통제방식으로 업무를 하는 것이 더 편하기 때문인데 행정권한이 약한 단과대학은 고스란히 업무를 떠안을 수밖에 없다. 물론 단과대학은 본부부서처럼 각 업무의 전문성을 갖출 조건이 되지 않는다.

③ 다양성보다는 장소 및 소속의 획일성만을 추구하는가? 그렇게 되면 조직의 소통과 융합은 더욱 어려워진다. B부서의 수리업무 지원을 받아야 하는 대상은 조직 전체다. 그렇다면 B부서 직원들이 특정한 장소에서만 모여 다른 부서의 문서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 최선일까? 매일 건물을 순찰하거나 아예 주요 거점에 분산해 근무할 수는 없을까? 일의 현장보다는 부서의 동질성을 우선하려는 이 같은 현상은 아주 일반적이다. 하지만 원스톱서비스센터는 왜 겉돌게 되는지, 정보시스템 지원은 왜 행정 현장에서 멀어져 있는지, 교수연구실은 왜 학과별로만 배치돼 있는지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성의 문제를 한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④ 위기대응체계가 관료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는가? 그렇게 되면 조직의 위기대응능력은 떨어지고 구성원의 업무위험성은 높아진다. 강의실 손잡이 파손은 비교적 덜 위험한 상황일 수 있다. 화재와 같은 큰 위기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위기관리시스템은 다른가? 아마도 현장에서 신속한 대처를 할 수 있는 특별한 시스템이 아닌 관료적 의사결정시스템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허둥댈 가능성이 크다.

⑤ 사람이 시스템에 종속되지 않았는가? 시스템이 고도화될수록 사람이 시스템에 종속되는 현상은 더 심화되고 조직의 유연성도 떨어진다. A와 B의 담당자는 손잡이 파손 사실을 서로 인지하고 있고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안다. 하지만 행정은 더 이상 사람의 의지나 판단이 아니라 프로그램화된 시스템의 명령에 의해서만 움직이게 된다. 변화는 이러한 현상들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한국대학신문>

저작권자 © 한국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