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구 (본지 논설위원,한국과학창의재단 연수원장)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문맹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했다. “21세기 문맹은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고, 배운 걸 잊고, 다시 배울 줄 모르는 사람”이라며 평생학습을 강조한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의 격랑을 헤쳐나가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행위는 학습이다. 배우고 익히면 즐겁기 때문이 아니라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으며 변화를 선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 대학의 역할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이뤄지고 있다. 변화를 어떻게 준비할지, 대학교육 과정과 교수학습법은 어떻게 바꿀지 등의 전략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사람이다. 경영의 귀재였던 GE의 전 CEO 잭 웰치는 “사람이 우선이고 전략은 그 다음”이라고 말했다. 전략이 훌륭해도 사람이 준비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고, 전략이 다소 부진해도 사람이 훌륭하면 충분히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다. 사람을 기르는 교육에서는 가르치는 사람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교육의 질은 결코 교사의 질을 넘어설 수 없는 법이다. 《교사학습공동체》 의 저자들은 20세기와 21세기 교육개혁의 가장 큰 차이점은 20세기 교육개혁은 모든 교육의 문제의 근원을 교원으로 봤지만 21세기 교육개혁은 교원을 교육문제의 해결점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교원혁신이야말로 교육혁신의 출발점이다. 대학도 마찬가지다. 그럴듯한 대학교육 혁신 전략보다 대학교수들이 역량을 갖추고 스스로 혁신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대학생들이 우스갯소리로 “금방 임용된 젊은 교수는 아는 것, 모르는 것 닥치는 대로 공부해서 가르치고, 좀 이력이 붙으면 아는 것만 가르치고, 나이가 들면 생각나는 것만 가르친다”고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물론 극소수에 불과하겠지만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이래서는 안 된다. 젊은 교수든 나이 든 교수든 모두 배우고, 배운 걸 잊고, 새로 배우기를 계속하고 즐겨야 한다.

2500년 전 공자는 ‘생이지지자상야, 학이지지자차야, 곤이학지우기차야, 곤이불학 민사위하의(生而知之者上也, 學而知之者次也, 困而學之又其次也. 困而不學, 民斯爲下矣)’라고 가르쳤다. 그 뜻인 즉 ‘나면서부터 아는 자가 최상이고, 배워서 아는 자는 그 다음이며, 곤경에 처해서 배우는 자는 또 그 다음이고, 곤경에 처해도 배우지 않는 자는 최하’라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꼭 새겨야 할 가르침이다. 나면서부터 저절로 아는 사람은 없다. 배워서 아는 ‘학이지지’가 바람직하다. 곤경에 처해야만 배우거나 곤경에 처해도 배우지 않으면 변화의 흐름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 대학은 ‘학이지지’의 요람이자 지식의 최전선이다. 대학에서의 배움은 시대를 선도하는 지식과 기술, 근본적 성찰이어야 한다. 미래를 보려거든 고개를 들어 대학을 보면 되는, 그런 사회가 올바른 사회다. 대학의 운명은 스스로의 선택에 달려있다. 트렌드를 읽고 스스로 혁신해 변화를 선도하는 대학, 변화의 흐름에 떠밀려 마지못해 변화를 선택하는 대학, 변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변화하지 않는 대학 중 어떤 대학이 돼야 할까.

교수와 학생 관계 변화도 필요하다. 교수는 가르치고 학생은 배우는 일방적 관계에서 탈피해 교수와 학생이 서로에게서 배우고, 함께 공동학습을 하는 생산적 관계로 바뀌어야 한다. 교수든 학생이든 끊임없이 배우고 지식을 업데이트하는 것이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학습법이다. 대학교수는 최첨단 글로벌 지식을 배우고 익히고 스스로 만들어 학생은 물론이고 사회와도 나눠야 하는 책임을 갖고 있다. 새로운 생각, 제안, 혁신적 아이디어는 대학에서 먼저 나와야 한다. 토플러는 《부의 미래》에서 변화의 속도가 가장 빠른 건 사기업이라고 썼다. 가령 사기업의 변화 속도가 시속 100마일이라면 NGO는 90마일, 가족은 60마일, 노동조합은 30마일, 정부 관료조직은 25마일이며 학교는 10마일에 불과하다. 1마일의 법, 5마일의 국제기구보다는 빠르지만 변화 속도가 최하위권이다. 교육이 제 역할을 하려면 속도감 있는 변화, 누구나 체감 가능한 변화가 필요하다. 지금처럼 대학교육이 기업이나 사회의 변화에도 뒤처진다면 대학은 더 이상 존재의 이유가 없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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