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 광주보건대학교 교수

▲ 김미 교수

“이제 해외 나가기가 겁나네요.” 크게 맘먹고 가족과 유럽여행을 간다고 했던 어느 교수님의 넋두리다. 사연인즉 여행 초기에 여권에서부터 지갑, 노트북컴퓨터까지 몽땅 분실했단다. 현금하고 카드가 없어 불편했던 건 둘째 치고 영사관을 들락거려야 하는 번거로움에 내가 왜 그랬을까라는 자괴감마저 들어 일정 자체가 엉망이 됐다는 거다.

평소 용의주도한 그분의 성격과 전혀 어울리지 않아 의아해하면서 내용을 들어보니 이건 더욱 황당하다. 카페에 들어가 소지품을 내려놓고 카운터의 메뉴를 살피는데 그냥 대놓고 가방을 가져가더란다. 눈앞에서 바로 일어난 일이라 일행 중 남자 몇 사람이 쫓아가봤지만 연기처럼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고 했다. 공항에 도착한 후부터 소매치기와 절도 조심하라는 얘기를 가이드로부터 귀에 못이 박힐 만큼 들은 터라 더욱 어이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는 과거 빛나던 유럽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고 우리나라가 백배 천배 낫다고 씁쓸하게 웃는다.

문득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라는 TV 프로그램이 생각난다. 외국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우리나라의 모습을 보여주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여행과정에서 여러 나라의 국민성이 재미있게 그려지곤 해서 자주 시청하게 된다. 그런데 그 교수님의 얘기를 들으면서 TV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몇 장면이 떠오른다. 한국의 치안이 무조건 세계 최고라고 치켜세우던 멕시코 친구들, 식당에 두고 나온 아끼던 모자를 한참 후에 가서 다시 찾고는 놀라워하던 인도 친구들, 늦은 밤부터 새벽까지 안심하고 도심을 돌아다닐 수 있다는 데 감탄하는 서유럽 친구들의 모습이 그것이다. 그 장면이 방영될 때는 ‘아니 뭐 저런 걸 가지고 그럴까’라며 방송특유의 호들갑 정도로 여겼다. 하지만 유럽에서 낭패를 당하고 어쩔 줄 몰라했을 그 교수님의 모습과 안전한 한국의 치안에 찬사를 보낸 TV 속 외국인들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알 수 없는 경이로움을 느낀다.

언젠가 세계에서 가장 치안이 안정적인 나라로 미국, 유럽 등 전통적인 선진국이 아닌 일본, 싱가포르, 한국을 꼽은 조사결과를 본 기억이 난다. 처음엔 단순히 총기사고나 테러위협에서 비교적 자유로워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치안 관리시스템은 말할 것 없고 국민성, 시민의식까지 종합적으로 우수하다는 것이다. 모르는 사이 한국이 정말 많이 변했고 드디어 다른 나라에서 인정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모든 면에서 항상 그들을 최고로 생각하고 부러워했던 우리 세대에게는 마냥 신기하기까지 하다.

비단 이것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나라 대중교통의 편리함에도 감탄을 금하지 못한다. 싸고 깨끗하고 정확한 데다 교통수단 간 연계시스템이 매우 잘돼 있어 그렇다고 한다. 대중교통만으로 원하는 어느 곳이든 갈 수 있는 국가는 지구상에 몇 안 된다는 거다. 하긴 언젠가 나도 아들 녀석 교통카드를 빌려 며칠 동안 대중교통만으로 움직여본 적이 있다. 어린 시절 오지 않은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곤 했던 나로서는 휴대폰 앱까지 활용한 편리함의 신세계에 적잖이 놀랐다. 각종 테크놀로지의 발전으로 어느 나라에서나 이 정도는 쉽게 구현하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사실은 선진국에서조차 놀랄 정도로 우리나라가 매우 예외적인 편리함을 누리고 있는 모양이다.

한두 가지가 좋으면 모든 게 좋아 보이는지 이제 외국인들은 우리나라의 모든 것에 엄지를 들어 올린다. 부담스러을 정도다. 인터넷 속도가 빠른 것, 어디에서나 와이파이가 잡히는 것과 같은 엄청난 정보화 수준에 찬사를 보낸다. 심지어 입맛에 잘 안 맞을 것 같은데도 한식이 최고라고 한다. 걸그룹, 보이그룹 등 연예산업을 중심으로 시작한 한류가 음식 문화를 거쳐 국가 인프라까지 확산되는 등 전방위적으로 펼쳐지는 것 같다는 거창한 느낌마저 든다.

분명 어느 면에서는 과거 반짝반짝 빛나던, 그래서 우리가 동경하던 선진국의 모습이 우리나라로 옮겨온 듯하다.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안전하다, 편리하다, 맛있다와 같은 평범한 개념들이 주를 이룬다.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일이라 정치가 어떻고 경제가 어떻다는 등 좀 더 그럴듯한 걸 기대한 우리에겐 사실 좀 싱거운 인상을 준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확실히 한국의 위상이 변하긴 한 것 같다. 조금은 자랑스러워해도 나쁘진 않을 듯하다.

오늘도 나는 붐비는 카페에서 노트북과 휴대폰으로 자리를 일단 맡아놓고 주문을 하러 자리를 뜬다. 유럽에서 고생하셨다던 교수님이 생각나 급하게 주문을 하고 자리에 와보니 뭐 그대로다. 외국인들은 이런 당연한 걸 놀랍다고 한다. 감탄하는 그들이 나는 더 놀라운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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